▲ 이윤주 한국여자의사회 국제이사
프라이빗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

나의 작은 진료실은 속마음을 터놓는 편안한 공간이다. 웃으면서 명랑하게 들어 온 사람이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많이 어려우셨구나” “힘든데 잘 견뎌 오셨군요”하는 배려 섞인 한마디의 말에 금방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어디서도 마음을 내려놓고 실컷 울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엉엉 통곡을 하는 분들도 있다. 무엇이 그토록 저들의 마음을 아프게 서럽게 했을까. 한사람 한사람 얘기를 듣다보면 나 역시 마음이 져며 온다. 힘든 삶을 사는 우리들이다.

#A는 30대 중반의 어린 두 자녀를 둔 주부초년생이고, 전문직 30대 후반의 남편이 있으며, 자신도 직장생활을 하는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열심히 사는 여성이다. 앳되고 예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은 그녀는 왜 자신이 정신과전문의에게 왔는지 무척 의아해하면서도 최근에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 무너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 역시 너무나 성실하고 아내밖에 모르며, 시부모님 역시 멀리 계셔서 하다못해 고부간의 갈등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몸이 너무 피곤하고 정신줄을 놓을 것 같고 아이들에게 짜증이 나고 남편이 다가오는 것도 너무 귀찮고 즐겁지가 않다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만이 최선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없는 것 같다, 어디 무인도에 가서 하루만 있다가 오고 싶다고 호소하면서 최근 남편이 첫째 아이를 심하게 때린 후부터 남편의 예민함과 충동적인 행동이 이해할 수 없고, 첫째가 너무 불쌍해서 늘 끌어 안고 울게 된다고 하였다.

#B는 40초반의 미혼여성으로 개인사업체를 운영한다. 유복하고 부유한 부모님 덕에 현재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고 지금도 함께 모시고 살면서 너무 사랑해 주시고 지원해 주셔서 늘 행복했었는데, 최근에 남자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너무 분한 마음에 극단적인 생각이 들면서 밤마다 가슴의 통증을 오는데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하였다.

부모님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 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이제 겨우 마음을 잡아서 시작한 관계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며 여태까지 사랑만 받고 살았는데 본인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남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신을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들어 부모님만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자살하고 싶다고 통곡을 하였다.

심리검사 Egogram에서 그녀는 양육적 어버이의 자아(NP)와 순응하는 어린이의 자아(CC)가 높게 나왔으며, 반면에 어른자아(A)는 매우 낮아서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무난하게 적응할 수 있겠으나 평등한 수평적인 관계 즉 연애나 친구관계에서는 매우 미숙하고 상처를 잘 받았을 것 같았다.

#C는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전문대를 졸업한 후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한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한 결과 최근에 팀장으로 승진하였다.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밤늦게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 팀원들을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였는데, 3개월이 지난 지금 본인은 일을 그만두고 빨리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데 절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서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하였다.

자신은 성격적으로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며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고 하였다. 팀원들에게 싫은 소리도 하고 업무수행을 위해서는 미움도 감수해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리더가 되어서 오히려 팀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눈치나 보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였다. 자기를 찾고 자신감을 회복해서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싶다고 호소하면서 여기서 물러서면 자신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해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 같다며 흐느꼈다.

의학적 모델은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신체와 외부환경의 변화에서 병리적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외부의 균이나 충격보다 인체의 저항력이나 면역력이 떨어질 때 소위 병이 생기게 되는데 정신적인 질환도 마찬가지로 환경의 스트레스에 대해서 본인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무너질 때 불안, 우울, 분노, 자살충동 등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치료에서는 개인의 자아강도(ego strength)를 높이고 비효율적이고 장애를 일으키는 정신방어기제를 좀 더 기능적이고 성숙한(functional & mature)한 것으로 대체하도록 돕는다.

위 세 여성의 문제를 개인적인 측면에서 성격이 예민하고 유아적이며 인간관계 대처기술이 부족하다고 해석할 수 있겠으나,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주부초년생으로 어린 두 자녀를 키우며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하고 남편의 사랑을 가꾸어갈 수 있는 기능적인 여성이 얼마나 있을까?

B여성은 부모님과의 분화(differentiation)가 잘되지 않아서 자신의 개별화(individuation)가 늦어진 경우로 부모님의 자아가 아닌 개별화된 자기 확립이 시급해 보였다. C의 경우는 최근 아들러의 심리학에서 소개한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해 보여서 자신의 열등감을 직면하면서 오히려 팀원들을 이해하고 자기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치료방향을 정하였다.

A여성은 혹시 첫째아이에 대한 남편의 과격한 충동적인 행동이 그의 성격이나 업무스트레스에 의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동시에 아내가 너무 아이들과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고 남편의 기본욕구에 대해 너무 무심하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도록 부부 상담을 의뢰하였다.

절망의 늪에서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눈물을 닦으며 계면쩍은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총총히 나의 작은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 그녀들의 모습이 무척 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한사람의 인생이 절망에 부딪힐 때 찾아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의사의 위치가 무척 소중하다. 의사의 길이 직업이면서 소명(mission)이라고 마이애미 밀러 의대 졸업식에서 역설한 하버드 의과대학 국제보건 및 사회의학부 교수인 폴 파머(Paul Farmer)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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