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현욱
한국여자의사회 국제이사
요즘은 버킷리스트를 적는 것이 유행인가 보다.

드라마에서, 혹은 영화에서 젊은 여성, 아니면 나이든 할아버지까지 하늘에서 뛰어 내리지를 않나 참으로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것을 본다.

아마도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나열하는 것이리라 나름 이해를 하고, 한번 적어 보기로 하였다. 머리 복잡하지 않게 두 가지를 떠 올렸다. 하나는 만화 영화 성우 노릇 한번 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독한 몸치를 면하는 것이었다.

언제였던가? 일방적인 의약분업 사태로 온 나라가 전대미문의 의사 파업에 들어간 때이니 벌써 15년이 흘렀다. 필자가 몸담고 있었던 대학병원의 수련의와 전공의들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가 출근하지 않는데, 유독 강력한 재단 이사장님의 훈시에 따라 모든 의대 교수들은 평소의 정상 근무에 더하여 응급실, 병동에 중환자실 당직까지 다 맡아 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 기간 동안 월급도 지급 유예가 되어 당장 생활비가 문제가 되는 상황까지 벌어져 부랴부랴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걸 개설을 한 기억이 있다.

많은 동료들이 우르르 주변을 떠나고 필자도 다소 심각하게 ‘의사라는 직업을 그만 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의대를 졸업하고 그 때까지 20년 동안 해온 게 의사 노릇 밖에 없고, 다른 방향으로 눈 한번 돌린 적도 없으니 참으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아니지, 할 줄 아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여 보자고.” 먼 옛날(?), 초등학교 때로 돌아갔다. 6년 연상의 쌍둥이 언니들 덕분에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청계천 헌 책방을 섭렵하면서 어린 나는 참으로 책을 많이 읽는 꼬마였다. 동화책, 삼국지, 위인전, 세계 문학전집과 국내 소설에 신문까지, 활자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 치웠다. 일본식 낡은 가옥의 깊숙한 벽장 속에 층층이 쌓인 헌 사과 궤짝이 나의 책장, 아니 책 상자였다.

그 덕에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매주 한 번씩 배당되는 소위 자율수업 시간에 앞에 나가 동화를 구연하는 것이 어린 필자의 업무였다. 한 번에 40분이었을까 하는 시간을 놀랍게도 초등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내내 교단에 올라 열심히 이야기를 하였다.

특히 초등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음악, 글쓰기, 그림 등 재능이 풍부하셨던 분이었다.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멍멍이와 꿀꿀이” 이야기를 낱장으로 만화 영화 밑그림처럼 수채화로 일일이 그려 오시고, 선생님이 직접 쓰신 대본에 녹음기를 동원하여 반 학생들을 성우로 연습시켜 그림 동화 공연을 하였다. 방과 후에 남아서 녹음기라는 신기한 기계를 앞에 놓고 멍멍이 대사를 열심히 되풀이하며 녹음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성우를 해보는 거야. 성인 역 말고 만화 영화 어린이 역할, 참 재미있겠다.” 갑자기 삶의 생기가 반짝 돌았다. 의사 노릇을 굳이 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아마도 할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은 우울하던 나날에 힘을 불어 넣었다.

밤 당직을 근 20년 만에 하며 벌어지는 가지가지 에피소드도 그냥 유쾌한 경험으로 기억할 만큼, 만화 영화와 성우에 대한 상상은 잠이 부족한 아침에도 벌떡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한 달이 지나고 또 두 달째가 되며, 우유부단한 필자는 먼저 떠나 버린 다른 동료들만큼 결단력 있게 새로운 삶을 바로 시작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파업은 끝났다.

파업이 끝나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간 필자에게 ‘만화 영화 성우’ 라는 소위 버킷리스트 1번은 15년 간 아직도 그대로 1번으로 남아 있다. 꿈으로 그냥 남겨 둘까, 아니면 그래도 죽기 전에 해야 버킷리스트가 맞지 않을까 지금도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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