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준
한림대 교수, 시인·수필가
변변한 한글 교과서가 없어 영문서적을 교재로 쓰던 대학 학창시절이었다. 책을 읽다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의사 마음’(physician’s mind)이라는 단어에 몰입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관절염 관련 국제 잡지에 실린 논문의‘Pooled indices to measure rheumatoid arthritis activity: a good reflection of the physician's mind?(류마티스 관절염 측정 풀 지표: 의사 마음을 잘 반영하나?)와 같은 문장 속의 단어다.

‘진단과 치료 및 예방의 명확한 방침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잘 판단해서 재량껏 하라’는 뜻이라고 여기면서도 연이어 적힌 두 단어는 눈길과 생각을 한참씩 끈끈하게 붙들었다.

의학 학술서적은 과학의 다른 분야보다 대개 더 두껍고 서술이 상세하고 길어서 나름대로 의학을 서술과학 또는 묘사과학으로 따로 분류하여‘descriptive science’라고 영문 명칭까지 붙여주었던 터였지만 ‘의사 맘대로’에선 어김없이 붙들렸다. 의사 맘대로?

‘의사 마음’ 의 의사는 누구인가? 의사는 환자, 보호자와 함께 의료의 한 가운데 자리한다. 거기에서 그들은 모두 질병에 관심을 갖고 있다. 질병은 그 역사를 인간과 함께 하며 우리에게 생명의 취약성과 생의 유한성을 절절하고 명징하게 일깨워 준다.

그러나 그들이 질병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도 환자도 병식(病識, insight)을 비롯한 개인 사정, 가정사, 직장, 신앙 등의 모든 세파(世波)를 짊어지고 마주 앉아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의료는 철저히 인간탐구, 인간이해를 전제로 환자 중심 의료로 그 방향을 정하고 빠른 속도로 개량되어지고 있다. 즉,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대상으로서 의사와 환자는 서로 공감하며 합력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의료의 현장에서 그렇게 구현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는 원시시대의 주술적 존재, 근현대의 권위주의적 의료의 일방적 공급자가 아닌 전문화된 능력과 동시에 종합화의 재능도 함께 지녀 인간을 이해할 줄 아는 소통 기능적 존재로 점차 규정되어 지고있다.‘ 의사마음’은바로이런존재의 사람이 지니는 마음이다.

‘의사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 ‘의사 맘대로’ 다. 그렇다면 ‘맘대로’는 무슨 뜻인가? 사전적 의미는 ‘하고 싶은 대로’ 다. ‘마음’ 은 ‘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 이다. 다소 추상적 정의다. 좀 더 구체적인 정의는 영영사전에 실려 있다. ‘Mind’ 를 ‘that which is responsible for one's thoughts and feelings’ 라고 풀이하고 있다. 번역하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당하는, 책임지는 것’ 이다.

그렇다 ‘responsible’ 이 강조된다. 순전(純全)한 의사가 지니는 마음이 순전한 의사의 마음이고 ‘의사 맘대로’ 는 순전한 의사만 할 수 있는 순전한 진행이다. 알든지 모르든지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임상적 타성(clinical inertia)은 의사 맘대로가 아니다. 그것은 의료 태만이고 의료 게으름이고 의료과실이다.

의학서에서 상대적으로 꽤 자주 보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허용을 의미하는 조동사인 ‘may’ 또는 ‘might’ 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의 텍스트북은 ‘should’ 나 ‘must’ 등의 필요, 명령, 강제의 조동사로 꽉 채워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생명의 다양한 가변성을 다루는 분야이니 가능성, 미래성, 자기 결정성을 품는 허용조동사의 역할이 퍽 값지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아직 확정적으로 정설이 세워지지 않은 의료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지식과 양심을 정성껏 모아 집중하는 자기 결정성이 발휘되게끔 북돋아주는 조동사의 활약을 믿게 된 것이다. 동기이론의 석학인 에드워드 데시(Decy)와 리처드 라이언(Ryan)의 주장처럼 ‘자기결정성은 자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 이기 때문이다.

‘의사 맘대로’ 를 짧게 이르면‘순전한 의사의 자기 결정으로’다. 의업을 천직으로 대략 사십년 가까워지는 요즈음도 가이드라인으로 꽁꽁 묶인 자기결정성이 손발만 간신히 삐죽 내어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는 악몽을 더러 꾼다. 그러나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이 의료를 동이고 우겨 넣을수록 자기결정성은 그 진가를 낸다. 어설픈 짝퉁이 범람할수록 진품이 더 빛나듯이.

점차 삶의 많은 부분이 첨단 컴퓨터, 인터넷 네트워크 등이 쏟아내는 빅데이터에 의존하면 할수록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고유 영역들이 더 빛나고 있다. 인간만이 감당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은 인간의 자기 결정성이 넉넉해야 해낼 수 있다. 예술, 스포츠 그리고 ‘may’ 와 ‘might’ 가 종종 등장하는 의료는 대표적 자기 결정성이 풍성해야 하는 분야다.

의학지식과 더불어 개인과 세상의 대소사가 듬뿍 담긴 자기결정 능력은 꾸준히 키워지고 닦여야 한다. 지침으로 짜인 틀 안팎을 간편한 환산 공식처럼 무덤덤하게 드나드는 데이터의 이면에 들어 있는 갈등과 곡절을 직간접으로 체험하며 자기결정성은 튼실해진다. 이렇게 튼실해진 자기결정성은 진료실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더 너른 곳에서도 의사 맘대로 생명을 고뇌하고, 의사 맘대로 그 고뇌의 값을 매기고, 의사 맘대로 떳떳이 책임지는 선한 꿈을 꿀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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