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선영 산부인과의원장
한국여자의사회 공보이사
마침내 올해 수능시험이 끝났다. 올 수능은 작년에 비해 어려웠다고 방송사마다 난리였다. 재수생 딸을 둔 20년 차 직원인 강 실장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아예 입학원서도 넣지 않고 올해 입시를 생각하면서 딸에게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안정된 직장을 원하는 터라 교대 진학이 목표였다.

나는 눈치를 봐가며 슬쩍 점수를 물어보았다. “후회가 많이 됩니다. 작년에 욕심내지 말고 그냥 대학을 보낼 걸.” 수능점수가 몇 점 안 올랐다고 했다. 강 실장 위로 차 송년회 겸 회식자리를 예년보다 빨리 잡았다. 회식 날 입고 온 모직 코트가 멋지다고 하자 늘 검소하게 살아왔던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원장님 제가 속상해서 밍크코트 하나 사 입으려고 해요.” “그래? 어떤 걸 사려고?” “비싼 건 아니고요, 신촌 현대백화점에서 쪽 밍크를 이어 만든 밍크코트를 입어보았어요. 할인판매라는데 170만 원이라네요.

”나는 병원 가까운 곳에 있는 밍크 전문점에 가면 200만 원 조금 더 주면 출퇴근용 통 밍크 재킷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거들었다. 딸 학원비 대면서 억누른 욕구가 분출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세련된 디자인의 고급스러운 은색 밍크코트 차림의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자궁암 검진은 국가에서 나오는 쿠폰으로 다른 검진 센터에서 받았다며 염증치료만 원한다고 했다. 값비싼 명품 가방과 롱부츠로 한껏 치장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쿠폰 의존 형환자였다. 나는 환자의 요구대로 진료했다.

그 환자는 다음 대기환자도 없는 터라 접수대에서 강 실장과 큰소리로 웃으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밍크코트가 멋지다는 말 한마디에 환자는 서슴없이 아파트 한 채 팔아서 아들 미대 진학 비용을 댔다고 했다. 아들은 삼수 끝에 모두 실패하여 현재는 군대에 가 있으며 환자 본인이 하도 상심해 하니 환자 남편이 위로 차 밍크코트를 사주었단다. 그녀는 무척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기 무섭게 유명한 손00 부티끄 표이며 묻지도 않은 코트가격까지 1600만 원짜리라고 했다.

“1600만원?” 나는 그렇게 안 보인다며 170만 원짜리도 못 사 입는 직원의 사기도 생각해 열을 냈다. 그러자 강 실장은 금방 얼굴이 벌게졌다. “원장님 저도 어제 밍크코트 샀어요.” “그래? 어디 한번 입고 나와 봐.”

검은색 쪽 밍크 반코트였다. 나름 썩 괜찮았다. “우와 멋지다. 얼마나 주고 샀어?” 하고 물어보니 “원장님, 이것 동대문 시장에서 65만 원 주고 샀어요.” 내 귀를 의심했다.

“홑 65만 원?” “네! 시어머니 드릴 밍크 목도리랑 같이 샀어요.” “정말 잘 샀다. 그런데 너 정말 대단하네.”

이 십 여년을 같이 일해 온 강 실장은 검약이 몸에 뱄다. 현대백화점에서 맘에 드는 것을 입어보고 느낌을 본 후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 사기 위해 밤 10시에 도매만 취급하는 동대문 광희시장으로 나갔다. 즉석에서 물건을 사러 온 생면부지의 여러 명과 조인해서 공동 구매 형식으로 샀다고 했다. 대단한 또순이였다. 심성이 착한 그녀는 팔순이 코앞인 시어머니 생일선물도 빠트리지 않았고 모두 다 저렴하게 샀다고 매우 좋아했다.

이십여 년 전 이맘때쯤인가 보다. 친정어머니가 밍크코트를 들고 내 병원으로 오셨다 “아니 웬 밍크코트에요?” 라고 하자 “내가 딸들과 며느리 주려고 샀다.” 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럼 이 코트를 네 벌이나 샀단 말이에요?” “그래, 너는 나이가 많으니 은색을 입거라. 이것은 암컷 털이라 가볍고 보드랍다.” 그 바로 직전에 시어머니가 주신 것은 다소 무거웠었다.

내 나이 30대 중반을 갓 넘긴 때였는데 어머니는 다른 동생과 올케는 검정으로 골랐고 내 것만 은색을 택하셨다.

어머니가 이 비싼 것을 어떻게 네 벌이나 살 수 있었을까? 백화점에서 샀다고 우기다 나의 끈질긴 추궁에 마지못해 어머니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롯데백화점 모피판매장에 가서 입어보고 상표 밑에 적혀진 생산자 연락처를 알아내 김포에 있는 모피공장을 직접 방문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없던 시절이었다. 함경도 또순이 기질을 발휘하여 백화점 가격의 3분의 1로 산 것이었다. 백화점 제품과 똑같은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작은 새 올케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시누이들에 대한 친정어머니가 내린 일종의 뇌물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모피 코트 한 벌을 더 입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 암 투병 중에 밍크 롱코트를 새로 장만하셨다. 짙은 갈색 코트가 두벌이나 있었음에도 연한 베이지색이 무척 입고 싶으셨나 보다. 딱 두 번 입으신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며느리인 나에게 일련의 유품으로 전해졌다. 체중이 80kg까지 나갔든 어르신이 걸치던 것이었으니 입은 모양새는 북극곰이 따로 없었다.

모피의 순기능은 추위를 막는 것 일 거다. 연일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올 겨울, 가격에 상관없이 밍크코트가 외적인 추위뿐 아니라 박탈감과 절망감이 뒤엉킨 허전한 마음마저 포근하게 감싸 안아 고단한 우리네 삶에 위안을 줄 거라 믿는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서로 릴레이 하듯 건네준 밍크코트는 이십여 년째 장롱 맨 앞 자리에 그냥 걸려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나는 나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는 밍크코트를 쳐다보는 것 만으로 따듯한 사랑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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