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정임
전 대전 로사신경정신과의원장
전면 창으로 가득 쏟아지는 아침 햇빛은 그리그의 ‘모닝필링(Mornig Feeling)’ 처럼 맑다. 창밖에 작은 화단이 있고, 탁자가 몇 개 놓여 있고, 중정에는 대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가까운 관평천(대전 지방하천)이 가을빛을 받아 거울처럼 반짝댄다. 범접하기 어렵게 우거진 늪지와 그 아래 고요하게 흐르는 관평천의 물빛에 반사되는 푸른 하늘과 하얀 황새 두 마리는 인상파의 한 장면과 다름없다.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라면 분명 여기 이 시점에서 점점이 황새를 찍고 음영과 굴절을 달리하는 채도의 미세한 차이를 화폭에 담았으리라. 인상파 시대를 연 그룹 중 순수하게 인상파 정신 및 그 기치를 고수하고 헌신했으나 생전에 작품이 팔리지 않아 자신은 실패한 화가라는 비탄의 편지를 의사인 친구에게 피를 토하듯 보낸 시슬리…. 회고전에서야 성가가 올라 천문학적 금액으로 작품이 팔린 이후 전 세계로 여기 대전시립미술관에도 그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피카소와 천재들” 전을 보러 갔다가 그 속에서 런던에서도 보지 못했던 “ 눈 내린 루베시엔느의 작은 길(1874)” 을 조우. 필립스 콜렉션(Phillips Collection)덕에 이렇게 거장들의 그림을 접한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춘희가 기념품 숍에서 시슬리 그림이 새겨진 북마크와 거울을 선물한다. 벽난로에 세워둔 “모레쉬르루앙의 아침 해(Morning Sun at Moret-sur-Loing)” 는 부활절 날 엑스포의 작은 갤러리가 눈에 띄어 들어갔다가 먼지에 쌓여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시슬리 그림을 빼앗다시피 사들고 왔다.

시슬리 풍경화는 대개 단순한 구도이다. 그 단순한 구도 속에서 화가 내면의 치열한 갈등과 격정이 여과된 예술혼이 무비의 정적과 대자연의 조화를 이뤄 보는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늑하여 들어가 고단한 발을 쉬고 싶게 한다. 대자연의 광휘를 그 변화무쌍한 채색의 그것을 화폭에 찍어 영원한 예술적 생명을 부여하여 거의 선적경지에 이르게 한 것은 가히 천재적이지 않은가? 경묘하게 춤추는 물결 바람에 나부끼는 상쾌한 나뭇잎 눈부신 햇빛의 명암과 터치의 신묘함은 색채의 은자라 칭송하고 싶다.

모네의 대범한 구도나 르노와르 같은 세속적인 색채를 쓰지 않았지만 공기의 진동이나 물의 흐름 특히 눈 온 뒤 축축한 담장은 나의 집 덱크에 눈이 내려 물기를 먹고 있는 그 겨울날의 차가운 공기가 훅하고 코끝에 닿는 느낌이다. 물리적 공간을 뛰어 넘어 신기하게 마치 이웃집처럼 다정하고 평온하다. 시슬리의 화풍은 유례없이 독특하여 후계자가 이어가지 못한 것은 애석하다. 그의 깊은 예술세계의 제단에 함께 오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고 비평가는 옹호하고 있다.

▲ 관평천(대전 지방하천)
온통 우거진 녹지대 아래로 호수처럼 맑고 잔잔하게 흐르는 관평천 물빛 그 위에 단아하게 다리를 접고 앉아 있는 황새의 흰빛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즐겨 입으시는 백색의 제의를 연상케 한다. 교황을 상징하는 강렬한 레드 힘과 권위의 표양인 레드를 사양하고 수수한 백색제의를 고집하는 저 결벽이 바로 호르헤 베르골료 신부님으로 불러 달라는 프
란치스코 교황이시다. 지엄하신 교황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몸소보여 주시는 겸손한 삶이 우리 모두를 열광의 기도로 내모는 게 아닌가!

황새를 보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순백색의 제의를 연상하였다하여 교황이 무엄하다 호령하실 것 같지 않다. 그래 어쩌면 우리 모두 한 마리 황새와 다름없는 이 우주속의 한 생명체 아닌가? 내일 이지구를 떠나야할 연약한 존재! 그러나 그 속에 무용한 고집과 아집과 편벽은 물론 온갖 속악한 씨앗을 품고 있으나 그래도 눈뜨면 또 어질게 살아보고자 입술을 깨물고 다짐하는 너와 나 아닌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용서라는 벽을 치고 피눈물을 뿌리며 땅위의 평화를 지키는 우리들 인간이란 한 종도 우주의 한 먼지에 불과한 게 아닌가! 우리가 이렇듯 물가에 오면, 나무와 풀을 보면, 햇빛을 보면 훅하고 부는 가을바람에 가슴이 설레는 것은 물가에 앉아 자적하게 날개를 접고 있는 망중한의 저 황새와 다름 아닌가!

이 가을빛과 하늘은 찬란하나 이 좋은 날씨는 어찌나 재빨리 지나가는지! 나의 심상에 이 대자연의 광영을 간직하고자 예찬의 열병을 앓는다. 이 청량한 가을의 절정에 시슬리의 찰랑대는 물결과 월드컵 경기장에서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한 교황의 온유한 음성이 귓가를 쟁쟁 울리는데 나는 시슬리 그림속의 루베시엔느의 다리 밑을 흐르는 강물소리를 들으며 가을날 오후 낮잠을 자다가 어쩌면 한 마리 황새가 되어 꿈속을 날다가 깨어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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