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간호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계기는 1998년 바로 외할머니의 입원 때 있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친할머니가 안계서서 할머니에 대한 정과 추억은 오직 외할머니만 있었던 제게 심근경색으로 인한 할머니의 갑작스런 입원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속상했던 건 간호사들의 차가운 모습이었습니다. 힘겨워하시는 할머니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솟았던 제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팠고, 그 서운함과 상처가 제게 간호사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후로 친절하고 따뜻한 간호사가 되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정진했고 뜻했던 대로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고대안암병원에 입사하여 처음 인공신장실로 발령을 받았을 때 내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우리 할머니를 돌보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고된 일과로 인한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씩 일을 배워가는 즐거움과 어설프나마 분주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노력했던 제게 차츰 믿음의 웃음을 지어주시던 환자분들의 모습을 보며 씩씩하게 간호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8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환자분들께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 전전긍긍하기 바빴던 풋내기 간호사였던 제가 이제는 복막투석 전담간호사가 되어 환자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는 환자분이나 보호자분들께 핀잔 듣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도 가셨고, 수시로 진행되는 환자교육도 침착하게 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8년 동안 간호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며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가고 간호사의 길로 들어섰을 때 가졌던 처음의 마음가짐과 열정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그 어르신을 만나게 된 것은 바로 그 무렵쯤이었습니다.

복막투석교육에서 처음 뵙게 된 어르신은 교육 중 내내 제 말을 듣는 것인지 주무시는 것인지 대답도 없이 무척이나 헷갈리는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눈도 마주치지 않으시고 딴청 피우는 듯 푹 숙인 고개와 축 늘어진 어깨, 눈의 반 이상을 덮을 정도로 푹 눌러쓴 털모자가 어르신의 닫힌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첫 내원 이후로 복막투석을 시작하실 때까지 몇 번을 더 뵙고 교육을 할 때도 여전히 대답도 없으셨고,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띄워보려는 저의 여러 노력에도 어르신의 웃음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어르신이 조금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20년 가까이 앓아온 당뇨와 그로 인한 여러 합병증.. 남들은 하나만 앓고 있어도 힘들다고 할 무거운 병들을 앓고 계셨던 상황에 만성신부전이라는 진단까지 추가로 받으셨으니 삶의 의욕을 잃고 모든 일에 힘겨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르신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고민하는 때 그 어르신께서 우리 병원의 주차관리실에서 일하시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근무시간 중에 투석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거의 하루에 한번씩 어르신의 얼굴을 뵐 수 있었고, 간혹 못뵙게 되는 날에는 제가 퇴근하면서 잠시 들러 안부를 묻고 인사를 드리고 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자주 만나면서 간호사와 환자 사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딸처럼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갔습니다. 한번만이라도 어르신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겠다는 그런 저의 진심어린 노력을 아셨는지 어르신도 마음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가기 시작하시면서 자연스럽게 병과 치료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편하게 하시고 사소한 고민거리도 제게 상담을 해오시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어르신과의 만남이 늘어가고 짧았던 대화의 길이가 점점 길어질수록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어르신의 대답과 웃음을 더 많이 듣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복막투석실에 들어오시고 감기로 기침을 심하게 하는 제게 비타민을 섭취해야 감기가 빨리 낫는다며 오렌지와 귤을 사다주시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새로 투석을 시작하여 두려움이 앞서는 신환분들께 선배로서의 경험담과 병원에 대한 이야기 등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면서 하루빨리 투석에 익숙해 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는 선배 역할도 톡톡히 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 어르신께서 일하시던 주차관리실에서 퇴직을 하게 되셨는데 그 날이 제가 휴가인 날과 겹쳐서 만나 뵙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다음날 출근한 저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께서 마지막 출근 날 저를 만나지 못한 아쉬운 마음에 복막투석실안에 있던 얇은 휴지에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정성스레 편지를 써서 책상위에 놓아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복막투석실 여기저기에 따뜻한 마음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남겨주고 가신 것입니다. 정말이지 너무 행복하고 뿌듯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투석 초반에는 많이 힘겨워하셨지만 이제 복막투석 전도사가 되실 만큼 웃음과 여유를 찾게 된 어르신께서 제게 써주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너무나 따뜻한 위로임과 동시에 간호사의 길에 들어설 때 가졌던 처음의 마음가짐을 잃어가던 제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질책의 말씀으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깊은 위안이 담긴 소중한 마음의 표시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희미해지던 처음의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해 휴지에 쓰인 편지를 집에 가져와 메모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 이후로 병원일이 힘들고 지칠 때 저는 메모판에 붙어있는 어르신의 편지를 읽으며 그 마음과 따스한 정을 되새겨봅니다. 늙고 병들어 힘들어하시는 환자분들을 우리 할머니처럼 돌보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시금 일깨워주시고 제 일에 대한 긍지와 보람을 몸소 느끼게 해주신 어르신과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며 앞으로도 환자들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간호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오늘도 다짐합니다.

박현선

고대안암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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