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 길게 비탈줄기가 작은 포구에는 푸른 물결이 백옥같이 부서지며 백사장을 이루고 있다. 이녹크 아덴은 돈벌이를 위해 포구를 떠난다. 불행하게 사고를 당해 배는 파선되고 10여 년간의 무인도 생활을 겪는다. 슬픔 속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그의 아내 애니는 이녹크가 죽은 줄 알고 어렸을 때의 벗 필립과 재혼한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이녹크 앞에 놓인 것은 애니와 필립의 행복한 생활이었다. 애니의 즐겁고 다복한 나날을 확인한 이녹크는 자신을 숨긴다. 행복한 그들의 모든 것을 축복하며 기도하는 이녹크 아덴은 가난과 고생의 10여 년에 얻은 육신의 병에 스러져 간다.

저자인 영국의 계관시인 Alfred Lord Tennyson(1809~1892)은 대개의 다른 시인과 달리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던 연유로 그의 시에는 강퍅함과 굴절이 없다. 대신에 확실하고 온건하게 법칙을 준수하며 타당한 선(善)을 이루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비평가 Morley는 “영국인들을 ‘이녹크 아덴’을 읽었나? 안 읽었나? 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몰리는 이녹크의 불타는 듯하면서도 차분한 열정에 넘치는 자기희생의 정신과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불이익과 곤경을 자신의 잘못과 자기의 탓으로 감싸는 겸허함을 비록 글을 통해서라도 접해 보았는가? 아닌가? 를 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이녹크 아덴’은 1971년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으나, 그 전에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원본을 구해 서로 돌려가며 읽곤 했다. 물론 전문 영문학자들이 아닌 터라 정확한 뜻은 파악 못했지만 이녹크의 정열에 넘치는 자기희생의 정신,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남을 원망치 않고 철저히 순응해 가는 고결한 정신에 눈시울을 적셨다.

이제는 의료계의 한 귀퉁이에서 순수함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처지를 당할 때마다, 이녹크 아덴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필립과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애니에의 연민에 흔들리며 “나로 하여금 / 애니에게 말하지 않을 힘을 주소서 (Aid me, give me strength/Not to tell her, never to let her know-)” 라고 속으로 부르짖는 침묵을 뒤적인다. 또한 한 길을 가면서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마음과 육신이 게을러 뒤떨어져 버리고, 빗겨 밀린 것을 남의 탓이라고 둘러대고 싶은 천한 심보가 튀어나올 때에도 이녹크의 처연할 정도의 숭고한 자기 억제를 공감한다.

지금도 누추한 서재 한 켠에 이녹크는 말없이 앉아 있다. 가끔씩 그와 답답한 심사를 장황함 없이 운문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온 힘을 다하여 “A sail! a sail! / I am saved." 라고 외친 그의 마지막 말이 쟁쟁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항로(人生航路)의 돛을 타당한 폭과 높이로 되 세운다.

유형준
한강성심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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