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국의 성립과 몰락

김일훈
在美 내과 전문의

의약평론가

지금 러시아는 옛날의 영광을 먹고 살아가는 격이며 그 영광은 러시아정교(正敎)와 직결된다.

1천년 전 황무지였던 러시아 땅에 살던 ‘슬라브족’은 자연신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기원 천년대에 그곳에 전파되었으나 러시아인은 그들의 내려오는 습관인 약탈결혼과, 다처제(多妻制)를 금지하는 기독교를 싫어해서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지도자는 자연교(샤머니즘)가 미개인의 종교임을 깨닫고 다른 종교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회교, 유태교, 가톨릭교와 희랍정교를 두고 우열을 비교해 보았다.

회교는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돼지고기와 술을 금하고, 유태교는 조국이 없는 자들의 종교에 불과하며, 가톨릭교는 웅장하지 못해 위엄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실격되었다.
결국 호화찬란한 비잔틴문명을 창조해낸 희랍정교가 가장 적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러시아는 희랍정교를 받아들여 러시아정교국가, 즉 기독교국가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에 남아있는 소피아 사원은 그때(11세기) 건립한 것으로 러시아정교의 요람지로 미개인 러시아인이 최초로 문명과 접목한 곳이라 하겠다.

그러나 서방 문명과의 밀월기간은 잠깐이었을 뿐 3세기초 진기스칸(몽고족)의 침략을 받아 259년이란 긴 세월동안 그들은 야만족의 말발굽아래 짓밟혀 살아야만 했다.

몽고족은 중국을 점령해 그들의 종주국(원나라)을 만들고 아시아 대륙과 동구라파일대를 진기스칸의 자손들이 통치하는 한국(汗國)을 세워 활거했다. 그들은 폭력으로 99%가 농민인 러시아인을 다스렸으니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농민들은 반사반생(半死半生)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몽고인의 장기지배는 러시아 민족성에도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병적일 정도로 외국을 의심하고 외국인을 겁내는 피해망상과 함께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복욕과 군사대국 욕망이 몽고 지배하에서 이어받은 문화적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라파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꽃다운 ‘인간의 문화’가 만발하던 때인데도 러시아인은 문명세계와 차단된 채 노예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몽골제국은 자체의 내분으로 몰락해 버렸다.
그뒤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다시 러시아정교국가로 탄생되었으며 17세기초에 로마노프조가 성립되었다.

쯔아(CZAR, TSAR)로 불리는 제정러시아는 ‘귀족의 천국이며 농민의 지옥’이 되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은 농노(農奴) 곧 노예가 되어 몽고지배 때나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몽고귀족이 러시아 귀족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러시아의 귀족-지주는 다른 나라와 달라 농민을 농노라 하여 사물(私物)로 소유했으며, 그것도 한 지주가 몇백 명에서 몇천 명을 소유하며 그들 마음대로 매매할 수 있었다. 당시의 신문 광고란에 ‘순혈종 개 한마리와 16세 소녀를 팝니다’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 순혈종의 개는 2000달러, 농노 300달러, 그딸은 100달러 등의 시세였고, 솜씨 좋은 요리사나 음악인은 8백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이 엄청난 비인간적 사회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제한의 전제정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제정러시아는 존속할 수 있었다. 공산당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사악한 사회임에도 그 지배자들의 야망은 대단해 항상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다. 이반4세와 피터대제의 큰 야망을 이어받은 러시아인의 특성, 즉 황당무계할 정도로 무모하고 대담한 성품과 끈질긴 노력이 영토확장을 성공시킨 비결이라 한다.

땅덩어리 대부분이 동토(凍土)요, 초원과 숲인 쓸모없는 땅인데도 그네들의 한없는 욕망으로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정복한 것이 1648년의 일이다.

당시 세계도처에 있던 몽고국(汗國)은 완전소멸하고 몽고족은 인적 없는 시베리아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몽고족은 용맹무쌍한 싸움꾼이라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어 총과 대포를 가진 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종주국 원나라가 망할 때도 지배층은 말타고 북녘 시베리아 쪽으로 정처 없이 떠나 버렸으니 이를 북귀(北歸)라 일컫는다.

중국은 성격이 거친 몽고족을 개화시키는 수단으로 그들이 불교(라마교)에 귀의 하는 것을 적극 권장했다.

라마교승(僧)은 결혼하는 신부에게 첫 성교라는 축복을 주는 초야권(初夜權)을 갖고 있었다. 라마교승은 매독환자가 많아서 결과적으로 그들의 특권행사는 몽고족의 인구 억제에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세균전에 의한 인종멸망 정책이었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의 코작 기마부대는 몇백명 인원만으로 시베리아에 산재해 있던 몽고족을 정복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을 미워하는 몽고족은 러시아에겐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뒷날 중국이 외몽고 땅을 잃게 되고 또 소련혁명에 이어 곧 ‘몽고인민공화국’을 탄생시켰으니 징기스칸의 후예인 영웅들은 다시 말을 달리게 된 셈이다.

살벌한 지옥을 연상케 하는 시베리아는 예나 지금이나 유형지(Gulag Archipelago)였다. 주로 죄인들이 ‘개척인’으로서 그곳에 정착하였다.

지주들은 말을 안듣는 농노를 공갈 할 때 ‘시베리아에 보낸다’고 했으며, 사실 그러했다. 그것도 가족동반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고향에 남긴 처자를 그리워하며 일생을 마쳤다니, ‘이산가족정책’은 ‘쯔아’에서 비롯해 북한에 계승되었다고나 할까.

여자가 귀한 시베리아 땅에 황제의 명령으로 모집해서 시집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그곳에 몽고여인들이 있었지만 매독 의심이 많고 해서, 러시아 남자들이 잘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러시아는 역사가 말하듯이 죄악 덩어리의 나라였다.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는 일가몰살당하고 그 시신은 동물처럼 집단무덤 속에 내 버려졌다. 살인마 스탈린은 죽은 뒤 능지처참은 면했지만, 그의 동상들은 모두 파괴되고 철거되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러시아는 대국이다.
‘대인물을 낳는다’는 말이 실감나도록 러시아에는 거물급 천재들이 밤하늘의 기라성 같이 많다.

정치가 족속들을 그 명단에서 제외시키더라도 19세기 문단의 거성인 톨스토이, 토스토에프스키, 푸쉬킨, 체홉과 대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프로크피아와 과학자인 로바체프스키, 메치니코프, 멘델로프, 파블로프 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망했다고 하지만 이렇듯 뿌리 깊은 그 땅을 구경하겠다는 희망은 가졌다.

오르막이 높을수록 내리막길이 급하다. 초강대국이었던 그곳에 대한 큰 기대도 개인소득 1백달러의 개발도상국가 수준의 그곳 현실을 두 눈으로 보고 들었을 때 놀라움이 너무나 컸고 허무하기까지 했다.

‘러시아, 러시아’라고 하는 말은 여행객들의 조소꺼리요 멸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과거 한국과 한국인을 보던 외국인의 시각을 생각해 보았다. 또 “이것이 러시아다”하고 자기네 스스로를 비꼬고 비판하기를 주저치 않는 러시아 관광 안내자의 자학적인 언동도 인상 깊었다.

지난날 우리도 우리 자신을 ‘엽전’이라며 업신 여기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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