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시대의 제약산업 육성 전략

포지티브제도 포기할 수 있는 협상자세 필요

- 양기화 실장 <의협 의료정책연구소>

최근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체결을 위한 제5차 협상이 별 진전이 없이 끝났다. 한미 FTA 협상은 농업, 섬유, 무역규제, 자동차, 금융서비스, 의약품/의료기기 등 모두 17개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의료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보건의료분야의 협상진행과정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협상의 주요 아젠다는 전략상 모두 공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나, 미국측에서는 △의약품/의료기기 제도개선에 관한 사항으로는 건강보험 약가의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 추진에 반대의사를 표하고, 약가정책상 절차적 투명성 제고와 신약의 가치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한미 양국 관료들로 구성된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였다. △의약품 관련 지식재산권 분야에서는 특허제도와 식약청 허가제도의 연계를 요구하고 신약 허가 시 제출한 시험자료의 독점권보호와 기타 지식재산권 관련 특허보호 강화를 요구하였다. △보건의료서비스/투자 분야에서는 의약품, 의료기기, 식품 등의 조기 무관세를 요구한 반면 영리의료법인문제는 관심이 없음을 표명하였다.

우리측에서는 △간호사 등 전문직 자격/면허의 상호인정 및 취업쿼터 확보 △의약품, 의료기기 표준 및 기준의 상호인정을 추진 △생물학적제제(백신제제 등) 허가규정의 투명성 △의약품 특허만료된 제너릭 품목의 상호인정 △보건의료산업 상품의 통관지연 피해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의약품의 지적재산권에 관한 사항에 무게를 두고 있는 미국측 요구사항과 비교해보면 우리측 요구사항은 미국 측에서 수용하기 용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보건의료분야에서는 상호 요구사항을 철회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6월 5~9일 워싱턴에서 열린 1차 협상을 앞두고 정부에서 발표한 5·8 약제비적정화방안이 미국 측에 빌미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포지티브리스트제도에 관한 항목이 협상전략상 급하게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중간에 열린 두 차례의 의약품/의료기기 작업반 회의를 포함하여 5차례의 본협상 회의 과정을 보면 우리측에서 포지티브리스트제도를 지키기 위하여 미국 측을 설득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측의 요구사항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미국 측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너무 급급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국내에서도 일반의약품 복합제의 비급여 전환으로부터 시작된 동제도의 도입이 오히려 부정적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는 학계와 보건의료계 등 여러 분야의 지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추진의사를 밝히고 있는 정부는 포지티브리스트제도가 ‘건강보험제도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개혁조치’로서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정책주권에 해당하는 사항으로 국민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지켜야 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미국이 포지티브리스트제도를 지키기 위한 우리정부를 압박하여 얼마나 큰 이익을 챙겨갈 것인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의약품 가격통제체계를 무력화시키고, 제너릭의약품 장려정책을 폐지하기를 원하면서, △의약품허가와 특허를 연계하고, △자료독점권을 확보하며, △특허기간의 연장을 통하여 제너릭 도입지연, △새로운 용도의 특허를 재인가함에 따라 특허기간의 재연장, △강제실시권 제안 등을 관철하려 하고 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미국의 제약업계가 우리나라에서 추가로 가져갈 이익이 연간 176억~248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협상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5가지의 기본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첫째, 최선의 BATNA를 개발할 것.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는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당사자가 의존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다. 둘째, 최대의 양보수준을 정할 것. BATNA가 바로 최대의 양보수준이 된다. 즉, 최선의 BATNA보다 나은 조건이 되어야 성공적인 협상타결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상대방에게 자신의 bottom line을 공개하지 말 것. 자신의 최대양보수준인 bottom line이 공개되면 협상은 결렬되거나 최대양보수준 이하에서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 넷째, 상대방의 bottom line을 추정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일 것. 다섯째, 자신의 욕구수준을 결정할 것. 자신의 욕구수준이 적절해야 한다. 욕구수준이 지나치게 높으면 협상분위기를 해쳐서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으며, 욕구수준이 지나치게 낮으면 협상의 동기가 미약하여 쉽게 협상타결을 이루어지나 그 결과는 보잘 것이 없게 된다.

우리정부는 국내문제로 협상을 하거나 외국과의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협상전문가가 없다는 냉소적인 비판을 자주 받고 있다. 협상대표가 수시로 바뀐다거나, 협상능력을 갖춘 전문가로 협상단을 구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협상단을 비롯하여 협상단을 후방지원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이번 한미 FTA협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bottom line을 공개하지 말 것’이라는 협상의 기본정석 가운데 핵심사항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포지티브리스트제도의 도입을 근간으로 하는 ‘5·8약제비적정화방안’은 그 효용성에 대한 전망조차도 불투명하여, 의료계와 제약업계 뿐 아니라 많은 보건의료학자들 그리고 시민단체까지 가세하여 반대하였음에도 이를 관철해야 한다고 하는 배수진을 치고 나선 보건복지부의 정책기조는 이미 한미 FTA 체결을 위한 협상테이블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마지막 카드를 보여준 꼴이라 하겠다. 미국 측에서는 포지티브리스트제도의 도입으로 받을 손해보다는 의약품 특허관련 사항을 얻어냄으로써 얻을 이익이 훨씬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민간의료보험시장 개방 △영리법인 의료기관의 허용 등을 협상과정에서 다시 제기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고 판단된다. 두 가시 사안은 국민건강보험제도의 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즉, 영리법인제도가 도입되면 법인화된 의료기관에서는 이익을 내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의료비 폭등으로 건강보험재정이 고갈될 것이라고 한다. 민간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은 가입여력이 있는 부유층이 공적보험인 건강보험에서 이탈하여 민간의료보험으로 이동하게 되고, 상호부조를 근간으로 하는 건강보험체계가 흔들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건강보험가입자 가운데 상위 12%가 탈퇴하면 건강보험재정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한미 FTA를 반대하는 측에서 지나치게 견강부회하는 측면도 없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가입의무를 강제하고 있는 국민건강보험 가입자가 이탈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보건의료계에서 간과하고 있는 점은 한미 FTA협정에서 보건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점이다. 17개 분과 가운데 보건의료분야의 비중은 다른 분야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즉, 비중이 큰 농산물이나 자동차 분야의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건의료분야에서 대폭적인 양보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역구제분야의 진전수준에 맞춰 6차 협상에서는 우리측이 배기량 기준세제 개선과 다국적제약사에 대한 보험약가 결정과정 참여폭 결정 등 자동차와 의약품분야에서 우리의 양보안을 미국측에 제시하고 미국은 자신들의 요구인 배기량 기준 세제 개선 등의 진전수준에 따라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인하 폭을 결정할 전망이다”라는 세계일보 기사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보건의료분야에서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실행여부의 불투명성과 실행 후 달성할 성과목표가 불확실한 포지티브리스트제도의 도입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다는 협상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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