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평론가 수필 릴레이]

- 이창란 <수필가문인협회 회원 · 전 송림소아과의원장 · 의사평론가>

-경영기법과 몇 사람의 생명을 구했을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평생을 도전
의사동경, 공무원 길 접고 검정의 꿈 실현
개업도중 의대 편입 전문의 과정도 수료
개업의로 성공위한 경영학습에도 혼신

다행히도 자유로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자신이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만족을 느끼며 자신이 지닌 잠재력을 발휘하고, 기쁨과 희열을 누려야 한다.

세상은 달라져 고도 산업화 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종류의 직업이 있다. 그런데 그 일을 참으로 좋아서 적성에 맞아 하는 직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대개는 그 일이 좋아서,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가 아니라 생활의 수입과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의 경우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경우, 재벌 계승의 경우 자금과 경영을 분리하여 경영을 전문가에게 맡겨 성공한 예는 허다하다. ‘면장도 알아야 한다’는 옛말과 같이 아마추어가 전문직을 수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게 되면 일의 애착도 지니지 않고 책임감도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일은 하지만 일에 흥미가 없고 일과 사람이 혼신일체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일에 흥미를 가지고 책임을 느낄 때 사람은 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이 되어간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의사 되는 것이 꿈이었다. 꿈을 이루는 데는 많은 노력과 고통 그리고 산전수전을 겪어야 했다. 나는 평북 강계 산골에 태어나 그 곳 중학교를 나오고 군청에 취직이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차지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나의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의지가 있으면 방법이 있다는 말과 같이 친구로부터 조선총독부 시행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하고, 개업을 하고 있는 의사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침착하고 인자하게 보이는 의사는 나에게 시험제도와 의학서적까지 알려주었다. 태고의 고요함과 공부의 집중력을 위하여 의사는 절에 가서 공부하기를 권하였다. 강계읍 남쪽에 위치한 오남사를 찾아갔다. 산 설고 물 설고 나무와 새소리까지도 낯선 심산유곡에 있는 이 절을 나는 나의 그림자와 함께 오게 되었다. 낯익은 것은 의학 책 뿐이었다.

의학이란 이론을 충분히 이해하고 기억하여 이것이 되풀이되어 지식이 되는 것이다. 적성에 맞고 머리도 좋아야 한다. 공부를 해보니 첩첩산중이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 또 산이 나타난다. 중단 없는 전진, 후퇴는 생각도 말아야했다. 매일 착실히 정신을 집중하여 공부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의학지식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하는 일이 공부였다. 먹고 자고 쉬는 시간을 빼고 하루에 12시간을 전념 공부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사람은 미치게 되면 자연히 재미와 흥미가 생기는지, 어쩌다 책을 못 읽게 되면 공부 놓친 시간이 아까워 아쉬운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을 잘 때도 어떠한 문제를 뇌 속에 기억된 것을 풀다가 잠이 들곤 했다.

요사이 의과대학에서는 시청각 교육이라 하여 되풀이 강연을 한다. 이해를 하면 O/X와 사지선다형 문제를 줄 수가 있다. 일제 때는 모든 시험문제가 주관식이어서 답안은 논술식으로 써야 했다. 어슴푸레 기억한 것은 시험장에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철저히 머리에 정리 돼 있어야 논술 답안을 맞출 수 있다.

이리하여 춘풍추우(春風秋雨) 2년간을 절에서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의사 검정시험 2부 학술시험까지 합격하고 다음해 3부 임상시험을 거쳐 의사의 꿈이 이루어졌다. 오남사에서 1년간 공부하여 의사시험 1부를 합격, 공부에 자신감이 붙고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 절의 우아하고 꽃과 새소리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 봄이 오면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넓고 넓은 산이 빨갛게 물들었다. 먼 산을 넘어온 흰 안개가 끼면 빨간 진달래와 조화가 되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가을이 오면 빨간 단풍이 곱게 피고 푸른 노송이 대웅전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고색 찬란한 풍경은 기품 있는 옛 선비의 기상을 연상케 한다.

새소리도 계절 따라 다른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봄이 오면 산비둘기 그리고 꾀꼬리, 여름이면 소쩍새 머슴새(쏘독새), 뻐꾸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심야에 우는 소쩍새와 쏘독새 소리에 잠이 들고 새벽 뻐꾸리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뻐꾸기 소리는 듣는 사람의 가슴에 어떤 아득한 한이 베인 것 같은 소리로 심금(心琴)을 울리게 한다.

춘원의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일갓집 처녀 아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몸져 누워 꼬치꼬치 말라간다. 어느 날 드려다 보러 갔더니 그 아이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저는 죽어서 뻐꾸기가 되어 이산 저산 날아다니면서 내 한을 노래할래요.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릴 적에 읽었던 이 말이 문즉 떠오를 때가 있다. 산비둘기 소리도 슬프게 울려 내 가슴에 까지 그 서러움이 묻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꾀꼬리의 목청은 명랑하고 아름다워 여럿이서 들을 때 더욱 즐겁다. 내 고향은 추운 곳이어서 꾀꼬리가 6월에야 찾아온다. 처음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반가운지 마치 동산위에 막 떠오르는 보름달을 대하듯 반가웠다.

해방이 되고 곧 이어 6·25 동란을 지내는 동안 종합병원 근무와 개업을 시작했다. 수복 후 서울에서 개업이 잘 되어 먹고 살만하게 되자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 의과대학을 나와야 겠다는 생각에서 의대 3학년에 편입했다. 편안한 의사생활에서 학생생활 그 당시 비상한 결의와 용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학생이 되어 강의를 듣고 슬라이드를 보고 실습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흥미를 느꼈다. 과거의 의학 이론을 알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이론과 학설만 공부하면 되었다. 의사가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와 학생으로 공부하는 모습에 교수들은 나의 시험 답안에 관심을 갖는 사려 깊은 교수님도 계셨다. 의대에서는 성적이 나쁘면 재시험을 쳐야 하는데 학생들은 애를 먹는다. 나는 재시험에 안 걸리는 노(老)학생으로 유명했다. 졸업 후 인턴 레지던트 과정! 동시에 석사 박사 과정을 거쳐 1967년 나의 나이 47세 만학으로 소아과 전문의와 의학박사 학위를 형설의 공으로 받게 되었다.

다시 의대 공부를 시작한 나의 목적은 유명한 개업의가 되어 성공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개업의가 된 바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개업의가 되려고 했다. 소아과 레지던트를 할 때 개업의로서 병에 대한 치료계획이 세워진다. 개업의로서 할 수 있는 진단과 치료방법을 계획했었다. 레지던트 시절엔 의사란 실력도 있어야하고 개업의는 개업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개업의 번영론을 읽은 바 있다. 시대에 맞지 않았다. 미국 소아과 잡지에 소아과 의사의 개업술이 마음에 들어 교실 초독회와 의사회에 보고한바 있다. 미국 소아과의사는 의사의 선택권이 어린이보다도 어머니에게 있으므로 어머니의 기분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 대기실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꾸며 놓고 유행에 맞는 장난감을 진열하고 대기하는 동안 캔디나 밀크캐러멜 한 갑을 주어먹게 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여 재미나는 곳의 인상을 준다. 어린이 환자가 진찰실에 들어오면 어린이 이름을 부르며 맞이한다. 의사가 이름을 기억하면 어린이는 물론 어머니도 관심이 많다고 생각되어 기뻐한다. 진찰 후 어머니에게 병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과 어린이를 위로 해주고 병이 잘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소개환자인 경우 소개한 의사의 진료에 대하여 평을 삼가 하고 친절히 대해 주면 자기 환자가 되는 것이다. 진찰이 끝나면 어머니에게 기분 좋은 말을 건넨다. 옷 색깔이 시즌에 잘 맞고 유행하는 색깔로 부인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부인이 처음 오든가 또는 남편과 잘 아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옷에 신경을 써서 입고 온 옷에 대한 찬사는 외교적인 인사이다. 부인의 헤어스타일과 향수에 대하여도 칭찬을 하라고 했다. 부인이 의사를 찾아오기 전 헤어스타일을 위하여 미장원을 거쳐서 온 성의에 부인에게 관심 갖고 헤어스타일이 몽고메리 또는 비튜스 헤어스타일인지 알아맞히면서 찬사의 말은 미국사회에서 당연한 외교적인 예의라고 한다.

미국의사는 향수에 대하여 화제를 삼았다고 한다. 즉 불란서의 여러 회사 크리스챤디올, 샤넬, 겐달 등이 있는데 어느 회사 무슨 향수를 부인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냄새로 알아 맞추어 부인으로 하여금 수준 높은 박식한 의사임을 인정받는 다고 했다. 이러한 수준 높은 대화는 인생을살아가는데 있어서 감동을 주고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게 된다. 의사로서는 수준 높은 개업술이다. 우리나라 의사는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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