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평론가 수필 릴레이]

- 이정균<한양대 명예교수·이정균내과의원장>

"한북정맥은 여름에는 장벽처럼 둘러친 울창한 숲이 푸른 산맥을 이루고 겨울에는 눈 덮인 흰능선이 되어 47번국도는 신바람 나는 드라이브길이 된다. 봄에는 진달래 군락,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 그리고 단풍드는 가을은 등산객들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나는 지리시간을 좋아했다. 기다려지던 수업시간이었다. 오늘날처럼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어린시절, 구수한 여행담 같은 지리선생님의 입담 좋으신 강의는 재미있었다.

 “선생님은 그 많은 나라를 다 가보셨어요?” “?” 고등학교 때 울릉도를 다녀왔던 지리선생님과 동료 학생 몇 명은 전교생이 영웅대접 하면서 축하회를 열어 주었던 시절도 있었으니….

 지리시간에 자주 들었던 추가령지구대(楸哥嶺地溝帶)를 다시 찾아보았다. 국어대사전속에는 서울과 원산사이에 전개된 좁고 긴 낮은 골짜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쓰여 있기를 ‘지형상, 지질상으로 남한과 북한을 크게 이분하는 구조선(構造線)으로, 옛날부터 경원가도(京元街道)로 또 근래에는 경원선(京元線)통로로 중요역할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추가령은 강원도 평강군과 함경남도 안변군과의 사이에 있는 재로 높이는 590m다.

 한북전맥은 추가령 지구대를 따라 성벽 같은 산줄기가 뻗어내려 한강 이북에서 황해로 이어지는 산맥이다. 한북정맥은 47번도로를 따라 나란히 뻗어있어, 남양주시 진접에서 광덕고개까지는 회랑(回廊)지구대를 형성하여 여름에는 장벽처럼 둘러친 울창한 숲이 푸른 산맥을 이루고 겨울에는 눈 덮인 흰능선이 되어 47번국도는 신바람 나는 드라이브길이 된다. 봄에는 진달래 군락,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 그리고 단풍드는 가을은 등산객들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회랑지구대는 캬라멜고개(광덕고개)를 넘어 튼튼한 국방요새가 되어 서울의 북부 서울을 위한 최상의 성채와 요새를 두른듯 창칼을 들고 있는 늠름한 기상의 산맥이다.

 47번도로는 물산이동로요, 한양땅으로 이어져 오늘의 서울은 똬리를 틀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벌써 가을 타령이다.

 기온이 뚝 떨어져 서울은 12℃가 될 것이라 호들갑을 떨던 것은 불과 며칠전이었는데 또 더위가 찾아왔는가? 인디안섬머? 파격적으로 늦게 서울을 떠나 경기도 서북부로 달린다. 47번국도를 따라….

 그곳에선 높고 푸른 가을하늘 초가을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정말로 파스텔 톤의 형광펜을 칠해 놓았다는 말이 맞는가. 선명한 하늘 구름 한 점 없으니, 게다가 친구 심태섭 교수와 한국 자생식물동호회 강현석 이사를 따라 야생화 산행에 나섰으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야생화 사진전문가 김정명씨의 야생화 칼랜더에서는 정월부터 복수초, 노루귀, 홀아비바람꽃, 할미꽃, 금랑화, 구절초, 용담, 산국 그리고 동백의 순이니 지금은 구절초, 용담, 산국의 계절이 아닌가.

 국도의 절개지 양지바른 곳에는 키가 큰 달맞이 꽃이 발 돋음이나 한 듯 더 크게 보이고, 노랑색 작은 꽃이 모여 피는 마타리와 흰색꽃이 모여 피는 뚝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달맞이꽃은 월견초(月見草)라고도 부른다. 태양신을 섬기는 용감한 인디언 마을에서 낮보다 밤을 좋아하고, 달을 섬기던 아름다운 로즈아가씨의 슬픈 사랑이야기와 귀신의 골짜기에서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달맞이꽃으로 변하여 밤이면 언제나 달을 보고 피어났던 달맞이꽃은 석양에 꽃이 피고, 다음날 해가 뜨면 시들어 버리는 노랑색꽃 달맞이꽃은 여러 가지를 생각케 했다.

 지난 여름 동해안 여행 때 무궁화꽃, 오늘 다시 보는 무궁화는 특히 올해 더 신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온 나라가 작통권으로 어수선한 요즈음 꽃이 시원스럽지 못하다던가, 진딧물이 잘꿴다라던가, 게다가 우리 땅에 무궁화 자생지 없다면서 나라꽃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랜 역사 속에 든든히 자리매김한 역사성, 한번 피면 여름 내내 끈질기게 피니 그것은 우리민족의 인내심을 빼어 닮은 우리 꽃이 아닌가. 우리는 시련 속에 견디어 굳건히 사는 우리가 아닌가.

 이제 47번 국도도 뒤안길이 될 듯 싶다. 4차선 도로가 준고속화 되어 포천군 이동까지는 단숨에 내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대한남아 국방의무 다하며 다닌던 추억길은 이제 옛날을 잊어가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시골 간이역 같은 휴게소에 들어섰다. 긴대궁을 지닌 해바라기는 그 무거워진 머리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으나, 그저 커다랗고 노란 꽃잎을 달고, 따가운 여름 폭양을 향해 큰 얼굴을 돌리는 꽃만으로 생각 할 수 없는 꽃이다.

 가을 문턱의 꽃 해바라기는, 인간의 삶을 닮았으니, 우리에게는 교훈적인 꽃이다. 간이역 화단에는 백중(白中) 지난 끝물 복숭아, 청보랏빛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고 과꽃, 맨드라미, 금잔화, 칸나가 피어있었다. 벌개미취 옥잠화꽃이 한창이고, 참취와 부추는 희고 잔별꽃이 피어있어 아름답다.

 처서는 아직 여름을 처분해야 할 시기라는 뜻도 포함된 계절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긴 하더라도 풀숲에서는 방아깨비, 베짱이, 풀무치 그리고 사마귀들이 그들의 좋은 시기를 만끽하며 자손을 설계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허름한 간이역 휴게소 담장을 따라 눈길을 뻗히니 담장이가 벌써 붉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가을을 맞이하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누군가를 찾아 먼 산모퉁이 길을 타박타박 걷고 싶어지는 계절이 완연하니, 그 누구는 작년에도 찾아가 보존에 앞장섰던 금강초롱꽃이 되겠구나. 금강초롱꽃은 금강초롱 또는 화방초라고도 부른다. 그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 Nakai’다. 영어로는 ‘Diamond bluebell’이라 부르고 일본에선 ‘Hanabusa-so’로 칭한다. 한국특산종이다. 우리나라 중부 이북고산지대에 서식하는 다년초다. 숲속, 바위틈에 피는 꽃이다. 일본 나카이 교수가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하여 학명 뒤에 Nakai교수의 이름이 들어간 꽃이다.

 설악산, 금강산, 태백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꽃이다. 최근에는 경기도 북부 높은 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어 금강초롱의 서식지가 서서히 넓어져가고 있다.

 야생화 전문가들은 “산에 갔을 때 관심만 갖고 주위를 살피면 시야에 가득히 피어 있는 야생화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금강초롱꽃을 작년에 이어 올해 또 찾아가니 그 개체수도 늘어나 있었고 꽃이 두 개 세 개로 연이어 피어 있는 예쁜 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년에 보았던 금강초롱꽃 자생지에서 2km나 떨어진 치닷이 등산로 바위틈에서 금강초롱꽃을 보았으니 서식지가 꽤 넓어졌다.

 금강초롱꽃 찾아가던 등산로 초입에는 인공호수 장암호가 푸른 가을하늘에 물들어 더 푸르다. 여름에는 녹음 짙은 산이 물속에 잠기고 겨울에는 흰 눈을 덮어쓴 산봉우리가 호수의 주인이다.

 초가을의 상징 코스모스, 슬픈사랑의 꽃 달맞이꽃도 귀화식물이다. 망초, 개망초, 유홍초도 외국에서 시집온 식물들이다. 인간의 이동에 의해 원래 살던 곳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옮겨온 식물을 귀화식물이라고 부른다. 귀화식물은 양지쪽 햇볕 따라 산기슭에서 잘 자란다.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도 어언 50여 년이 지났다.

 등산로 입구 양지 바른 곳에는 호흡기질병을 일으키는 돼지풀이 결실기를 맞아 가루를 날리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포천지역은 오랫동안 외국군 주둔지역 이었으니 서양민들레, 돼지풀 그리고 미국 쑥부쟁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길섶에는 질경이, 영아자, 여뀌, 바랭이, 그렁이 뒤섞이고, 거북꼬리, 물봉선에 꿀벌들은 나비모양 붉은색꽃이 예쁜 싸리나무에서 마지막 꿀을 모아가고 있다. 국수나무, 배향초, 개쑥부쟁이, 가실쑥부쟁이와 담배풀, 멸갈치, 오리방풀이 뒤엉켜 앞길을 막는다.

 숲속 여러해살이풀, 오리모양의 자주색꽃 진범 그 이름은 진교가 맞다. 누룩취, 분취, 미역취, 단풍취, 취나물종류도 많은데 참나물, 둥굴레 나물꽃은 사람들 손때를 타 길가에서 볼 수가 없다. 전국의 산야가 전화에 시달렸고, 비, 바람 겨울의 추위와 설해를 이겨낸 이 강산에는 숲이 무성하고 야생화, 잡풀들이 대자연속에 자신들의 영역을 되찾았다. 식물은 생산자요, 동물은 소비자로 남는가? 끝없는 숙제다.

 꽃더미, 넝쿨을 뚫고 8부 능선을 오르며 금강초롱꽃, 진범, 승마, 씀바귀, 고들빼기, 송장풀에 고려엉겅퀴가 홍자색꽃 송이풀 분홍색꽃 등근이질풀이 방끗 웃고 있는 전쟁의 잔해 폐벙커를 발견했다. 인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그 얼마나 진첩이 있었는가? 자연복원은? 전화(戰禍)의 복원? 사시사철 피고 지는 야생화꽃 어느나라 어떤 군인들이 평화를 지키면서 저 예쁜 꽃들을 보았을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다가 군복무시절 월남땅 나짱의 후송병원곁 빈터에 서울에서 보내준 꽃씨를 심어 ‘고향의 꽃밭’을 만들어 향수를 달랬던 35년 전으로 돌아갔다. 봉숭아도 심어놓고, 나팔꽃 건물에 올리고, 과꽃 맨드라미, 채송화, 백일홍도 심어 예쁜 꽃을 보면서 마랄리아 환자들과 같이 즐겼던 후송병원 꽃밭과 야생화화원에 마음을 모두 빼앗겼다. 그래도 잡초(잡풀)이 있을까? 좁은 땅에서 사시사철 순번 맞추어 피고지니 식물의 세계에는 승승전략이 있을뿐! 이제 월남땅에 내가 뿌린 꽃씨들은 귀화 식물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봉선화도 나팔꽃도 모두 우리에겐 귀화식물이 아닌가.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