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창형<br>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보험위원회 위원장<br>비브라운코리아 대표이사<br>
채창형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보험위원회 위원장
비브라운코리아 대표이사

[의학신문·일간보사] 얼마 전 막을 내린 AFC 아시안컵은, 결과에 따라서는 온 국민들에게 축제이자 의미있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부진의 원인으로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은 물론 감독의 능력과 철학 부재다. 그리고 특정 포지션의 부진이나 4강전에서 핵심 수비수의 부재도 언급되고 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축구라서 차라리 다행이다.

이게 우리 환자들의 수술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축구에서는 한 명이 퇴장당하거나 주력 선수가 다음 경기에 결장해도, 어떻게든 경기는 이어갈 수 있고 가끔 기적도 일어난다. 감독의 역량과 리더쉽으로 메울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수술은 다르다. 하나의 품목 때문에 전체 수술이 멈출 수 있다. 축구는 결과가 아쉬워도 다음 경기, 다음 대회가 있다. 환자의 생명은 그렇지 않다.

작년 말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는 정부에 공급이 중단되었거나 여러 이유로 안정적 공급에 우려가 있는 제품군을 취합해 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 현재 업계가 처한 현실을 알리고 정책적 고려를 청하기 위함이었다. 협회가 제출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이미 4개 중분류에서 원가 부담으로 공급이 중단되었으며 30여개 중분류에서 1년내 공급 중단이 예상되고 있다. 다른 나라와의 심한 가격차 때문에 공급이 지연되는 품목들까지 더하면 상황은 심각하다.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앞서 말한대로 의료기기, 정확하게는 수술에 들어가는 치료재료 중 하나만 빠져도 수술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전체 의료기기 품목들 가운데 적은 부분이라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제품들의 공급에 빨간불이 켜진 이유는 거의 비슷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어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지 않고 있고 세계적인 경제침체의 장기화가 예상되는데다 글로벌 유통체계에서 팬데믹의 여파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서다. 또한 현재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의료기기규정(Medical Device Regulation, MDR) 개편에 의한 비용상승으로, 각국의 제조업체들이 저수익 제품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추세다.

수술에 들어가는 치료재료들은 그 필수성 때문에 대부분 건강보험급여 품목에 해당한다. 단일보험자 체계인 우리 국민건강보험 구조상 급여권의 치료재료들은 정부의 정책적 고려가 없으면 보험상한가 이외의 판매수입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즉 원가 압박이 높아지면 업계가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다. 버티거나,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원가 상승요인이 제거되면 어느 정도 숨을 돌리겠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그럴 것 같지 않다.

국내에서 공급이 안된다면 밖에서 대안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신에 희생이 작지 않다. 우리 환자들에게 사용되는 치료재료 특히 우리 업계가 만드는 제품들의 자리는 이미 빠른 속도로 중국이나 동남아 업체들의 값싼 제품들로 대체되고 있다. 당장 재정안정성에 기여할지는 몰라도, 우리 환자들의 건강에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기여할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해외 각국이 팬데믹을 기점으로 국민 건강을 안보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치료재료 등을 가급적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생산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업계와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는 지속적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정부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가 바라는 것은, 적어도 지금의 불리한 환경이 안정될 때까지라도 가격 인상이나 이에 준하는 정책 지원을 통해 업계가 견딜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것이다. 한시적인 치료재료 보험상한가 인상이나, 공급위기에 처한 치료재료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 일정기준을 충족하는 품목에 대한 정기적인 상한금액 인상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거버넌스와 시스템 구축 등이 업계가 내놓은 의견이다.

정부가 늘 업계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선뜻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는 여러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다. 업계 역시 가능한 노력을 다해 공급을 이어가려 하겠지만, 아무런 대책없이 이 노력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다. 축구와 달리 환자의 생명과 건강에 내일은 없다. 수술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나.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