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김영주 기자] 옛 부터 '어른'이 계신 집안에는 큰 소리가 담장 밖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든 갈등이 없을 순 없겠지만 어른이 있어 조심하고 그 어른이 어른답게 문제를 풀어가기 때문에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는다. 꽤 오래 지켜본 제약산업계가 그랬다. 치열한 경쟁속에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것이 냉혹한 시장 생리 일진데 기억나는 진흙탕 싸움이 딱히 없다. 그 흔한 주도권 다툼이나, 이해득실을 따져 핏대 세우는 광경을 본 적도 없다. 제약바이오산업계는 그야말로 ‘양반 집안’ 이다. 기업간 이권이 갈리거나, 협회 이슈에 대한 이견이 클 때, 그리고 정부 정책에 대한 산업계 합의가 필요할 때 등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산업계는 어른들에게 지혜를 구했고, 그 답을 찾았다.

김영주 부국장
김영주 부국장

산업계 '어른' 역할을 담당해온 제약원로 모임이 바로 팔진회(八進會) 이다. 팔진회는 지난 1975년 국내 주요 제약회사 30~40대 오너 경영인 8명이 모여 만든 친목 모임으로 무려 48년동안 이어져 왔다. ‘여덟 사람이 함께 나아가자’는 뜻으로 ‘팔진회(八進會)’로 이름 지었다. 강신호 동아쏘시오홀딩스 회장(현재 나이 만 95세)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90), 이종호 JW홀딩스 회장(90), 윤영환 대웅제약 회장(88, 2022년 작고) 허억 삼아제약 회장(86, 2022년 작고), 유영식 전 동신제약 회장(86),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85, 2022년 작고), 윤원영 일동제약 회장(84) 등이 그 '어른'들이다. 명문대 출신의 오너 경영인으로 젊은 나이에도 산업계의 주역으로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었던 리더 그룹이었다. 이들이 산업계 발전에 의기투합해 결성한 것이 팔진회 이다.

멤버 가운데 유영식 동신제약 회장의 경우 회사의 부침에 따라 2000년대 초 대내외 활동을 접었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 매월 골프모임 등을 가지며 건재한 모습을 과시했다. 대다수 멤버들이 제약협회(현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 및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산업계 현안에 대한 자문역을 맡아왔다. 산업계의 난제 해결의 숨은 배경에는 항상 그 들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오늘날 ‘제약주권’ 확립의 산파역을 담당해왔다. 그들이 일선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할 당시는 제약산업의 도전과 성장이 돋보였던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제약산업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연평균 34.7%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고, 이 같은 고도성장은 동아제약을 비롯한 당시 주요 제약기업들의 건실한 경영과 제품 개발 경쟁의 산물이었다. 의식 있는 젊은 오너 경영인들이 ‘제약보국’의 명분아래 신약개발 도전에 망설이지 않고, 질 좋은 제품 생산을 위해 한 눈 팔지 않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국민 건강을 스스로 책임지는 제약주권 시대의 뒷배가 됐다는 평가이다. 실제 당시 비슷한 경제여건의 동남아 다수 국가들이 자국 산업 부재로 외자 기업에 국민 건강을 의존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그들의 선구자적 역할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신약개발 오픈 이노베이션의 출발도 팔진회의 정신에서 비롯됐다는 풀이이다. 산업계가 힘을 합쳐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신약개발을 이루자는 의미의 오픈 이노베이션은 기업간 친밀함, 신뢰가 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 하고, 오랫동안 끈끈한 관계를 이어온 팔진회의 정신이 오늘날 오픈 이노베이션의 자양분이 됐다는 평가이다.

이런 팔진회가 9일 모임을 끝으로 48년의 동행을 마무리했다. 지난해 세 분의 회원이 갑작스럽게 타계한 것이 모임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팔진회는 잔여 회비를 제약바이오협회에 기탁, 산업에 대한 마르지 않는 애정과 기대를 표현했다.

팔진회의 마지막 간사 보령 김승호 회장은 “이제 모임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 마무리하면서 남아있는 회비는 협회에서 좋은 곳에 써달라”고 말했다. 이에 제약바이오협회 원희목 회장은 “팔진회 대선배들의 뜻을 이어받아 앞으로도 제약바이오산업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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