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 많은 사람들이 의료기기산업의 성장세에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물론 이 과정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도 멈추지 않는 도전과 혁신에 임해 온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현실은 낙관적인가. 그리고 상승세가 계속 될 수는 있는가. 심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채창형<br>비브라운코리아 대표<br>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보험위원회 부위원장<br>
채창형
비브라운코리아 대표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보험위원회 부위원장

지난 2년간 우리 의료기기산업은 수출이 수입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업계의 속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대부분의 지분이 코로나 팬데믹과 이로 인한 체외진단 등 일부 분야의 특수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우리 산업 자체가 체급이 커진 것은 아직 아니라는 뜻이다. 팬데믹이 사그러드는 시점에 그 뒤를 이을 주자도 뚜렷하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 업계가 외부요인에 마냥 의존해야 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열정과 가능성, 그리고 축적된 기술력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치료분야, 융복합 의료기기, 그리고 기존 치료분야 등 여러 방면에서 호시탐탐 국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들이 미래 보건의 모습을 한단계 바꿔 놓을 주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을 아직 넘어서지 못했을 뿐.

모두가 아는 것처럼, 연구개발은 보건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위이며 혁신의 원천이기도 하다. 기업의 입장에선 성장 발전 혹은 최소한의 생존을 통해 연구개발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에너지는 결국 원활하고 합리적인 시장진입 기회에서 나온다. 경제적인 면이나, 근거 확보의 측면에나 마찬가지다. 그 시장진입의 과정이 우리 업계에겐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의료기기산업협회와 업계의 수많은 회원사들이 지속적으로 정부에 요구해 온 사항으로, ‘선(先)시장진입·후(後)신의료기술평가(선진입·후평가)’가 있다. 적어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인허가를 받은 제품이라면, 시장에서 활용할 기회를 적절히 부여하면서 이후 추가적인 검토와 평가를 병행해 의사결정을 내리자는 취지다. 이는 용어와 표현을 조금씩 달리할 뿐, 약제나 체외진단 등 보건산업분야 전반에 걸친 화두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분야에서는 많은 제품과 기술들이 시장 내에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의료기기는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것일수록 유난히 여러 기관에서 긴 검토과정을 거치는데,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신의료기술평가가 그 중 하나다. 이 절차는 새로운 시도가 내포하는 리스크와 국민보건이 철저히 지향해야 하는 의료기술 안전성 사이의 틈을 메우겠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하지만 의료기술 평가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되려 혁신적인 의료기술의 손발을 묶는 결과를 가져 오고 있다.

업계의 더 큰 고민은 이들 신개발 제품들이 최종 관문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의료기술과 제품들은 시장에서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채 사라질 수 있다. 물론 정부에서도 이들 기술을 일부 구제하기 위한 방안들을 내놓기도 했으나, 업계 입장에서 실제로 기대할 수 있는 기회란 많지 않다. 다행히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했다 한들 이미 후발주자에게 기술적으로 다 따라잡힌 경우도 허다하다.

정부 자체 통계에 따르면 실제 신의료기술평가에 회부된 기술 가운데 기존기술로 인정받은 경우를 제외하고 절반 정도(975건)만이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아 시장진입에 성공했다. 875건의 기술은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다. 이들 기술의 운명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재심사를 요청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정부가 원하는 임상시험 결과 등 막대한 비용이 드는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해 결과는 잘 달라지지 않는다.

국내 제조사의 사정은 더 좋지 않다. 2007년부터 2016년 사이의 신의료기술평가 통계 기준으로, 전체 기술 가운데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은 것은 1/4 수준(23.86%)이다. 그나마 수입사의 경우 절반에 가까운 47.95%의 기술들이 신의료기술로 인정을 받았다. 특히나 상대적으로 영세한 국내기업들의 경우 시장접근 성공 여부는 개발자의 생사를 판가름할 수 있지만, 벽은 높기만 하다.

혁신보다는 현상 유지가 편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업계 전반에 만연하다면, 의료기술 전반에서 날로 발전하고 확대되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니즈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신속한 비용 회수를 위해 안전선(安全線) 안에 머물려 할 것이다. 의료산업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는 단순 복제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시도에서 나온다는 명제는 이제 새롭지가 않다. 하지만 안전한 경영이 최우선시되는 산업 구조라면 혁신을 위한 시도와 투자는 요원하지 않을까.

새로운 의료기술이 계속 시장 바깥을 맴돌게 된다면 그 피해는 업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존의 치료법으로 회복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산업이 활력을 잃고 환자들에게도 치료의 기회가 제한되는 상황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정부가 그간 업계의 숙원을 경청하고 필요한 노력을 한 것 또한 모르지 않는다. 식약처, 보의연, 심평원 등이 평가절차를 동시진행하거나 제한적 의료기술평가제도를 도입해 유망한 의료기술에 시장에서의 부분적인 활용 기회를 부여한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아직이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와 의료기기 업계는 올 초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정책제안서를 개발, 제출하면서 선진입·후평가 의제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 제안했다. 그 결과 일부 캠프에서 선진입·후평가를 정책대안으로 받아 들이는 등 실제 울림도 있었다. 정책입안가들도 현 상황에서 업계의 입장을 최대한 경청하고 적절한 방도를 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체외진단검사의 선진입·후평가 시범도입 등 여타 분야와의 형평성까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의료기술 때문에, 앞으로의 의료산업과 제품 그리고 서비스는 기존의 틀로 평가하고 규제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정부의 고민도 함께 깊어갈 것이 분명하다.

업계도 정부에 이 고민의 짐을 전부 떠 넘길 생각은 없다. 또한 의료기술평가의 필요성과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의료기술에 대한 심층평가로 환자의 안전을 담보하려는 제도는 해외에도 존재한다. 다만 시장진입의 기회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일부만 구제받는 환경에서는, 업계가 혁신을 회피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밖에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선은 식약처의 인허가를 받은 제품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시장에서 활용되고 일정부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필요하다. 다만 시장에서의 활용 과정에서 혹은 그 이전에라도 제기되는 우려가 있다면 불식되어야 한다. 정부와 업계, 사용자 모두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한다는 상호 합의와 실천의 기반 위에서, 사후적이지만 적극적인 신의료기술평가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의연을 비롯한 정부와 산하기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며, 큰 줄기는 유지되어야 한다. 또한 업계 역시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발생이 우려되는 문제를 선제적으로 관리하고 사후관리 절차 전반에 책임있게 임할 필요가 있다.

지난 2년여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 의료기기 산업의 약진은, 결국 남들보다 한발 앞선 시도가 차이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우리 업계도 그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진단키트나 디지털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허가 등 과감한 결단이 있었고, 우리 업계는 이에 부응했다. 이는 팬데믹으로부터의 빠른 일상 회복과 산업 발전이라는 결과로 돌아 왔다. 혁신과 규제 사이의 조화와 균형, 운용의 묘라는 것이 그 자체로 부가가치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 사례다.

의료산업은 본질적으로 많은 규제를 결부할 수 밖에 없다. 국민의 안전과 산업의 발전의 양립을 많은 이들이 바라마지 않지만, 관계기관의 입장에서 쉬운 과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리를 고쳐 앉고 전에 없는 변화와 이를 위한 새로운 방식의 대응에 열린 마음으로 임해야 할 때다.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고, 경쟁국들은 이미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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