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27>

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

프란츠 리스트 사랑

[의학신문·일간보사] 지난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가장 인기 많았던 음악가를 꼽아야 한다면, 아마도 헝가리 출신의 낭만시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애제자였던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모짜르트와 동시대 작곡가였던 살리에르에게 작곡을 배운 리스트는 16세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파리에 거주하게 되면서 무명의 음악교사로 일을 시작한다.

당시 예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파리의 사교계에 리스트는 1830년, 즉 그가 19살(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때)부터 진출하게 되면서 많은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파리의 살롱에는 상류사회의 인사들을 비롯하여 폴란드 작곡가 쇼팽,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 등의 음악가들을 비롯하여 쇼팽의 훗날 연인인 조지 상드, 위고, 라마르틴과 같은 문학가들이 함께 하였다. 이 모임을 통해 리스트는 당시 파리의 유명한 정치인인 생크릭 백작의 딸인 캐롤라인(Caroline de Saint-Cricq)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백작은 앞 날이 불투명한 가난한 음악가를 극구 반대하고 결국 리스트는 자신의 첫 사랑과 결별하게 된다. 그는 한동안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여 연주 및 작곡을 중단하고 급기야 가톨릭 신부가 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단념하게 된다.

1834년, 22살의 리스트는 뛰어난 연주실력으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무렵, 결별의 아픔으로 방황하던 그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치유된다. 파리의 살롱 모임에서 처음 만나 안면이 있었던 6살 연상의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사회적 체면, 가족, 부와 명예를 모두 저버린 체 사랑의 도피행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하게 되고, 그 후 11년 동안 세 명의 아이들을 함께 낳으며 긴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셋째 아이 다니엘을 낳은 후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끝을 맺는다.

마리 다구 부인과 헤어지고 난 후 리스트는 본격적으로 카사노바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피아노 악기 혼자만의 독주회를 처음 개최하고, 사상 최초로 암보(暗譜·악보를 외어 기억함)하여 연주를 하였으며, 엄청난 쇼맨십과 화려한 기교로 수많은 여성 팬들을 구축하며 매년 1000회 정도의 연주회를 열게 된다. 물론 화류계의 왕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열애를 했던건 물론이다.

이런 화려한 카사노바의 삶을 살 던 중 리스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846년,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진지하게 만났던 여인인 6살 연하의 러시안 공주 캐롤라인 비트겐슈타인(Carolyne von Sayn-Wittgenstein) 후작 부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어릴 적부터 종교에 심취했었던 리스트와 잘 맞았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약 15년 간 친구이자 연인으로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35살의 리스트에게 “명성도 충분히 얻었고, 나이도 있으니 이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후학 양성과 작곡에 전념하면 어떠냐”라는 제안을 한다. 그녀의 진심 어린 충고에 따라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제안한 궁정 악장직을 맡게 되고, 수백 개의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수많은 걸작들을 작곡하는 등 본격적으로 안정적인 ‘음악인’의 삶을 살게 된다.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남편과 법적으로 이혼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바이마르에 와서 리스트를 내조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결혼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 공작과의 이혼이 합법화 되기까지 긴 세월을 기다리게 된다. 1894년, 비트겐슈타인 공작이 세상을 떠나고, 드디어 이혼이 성립되어 리스트와 캐롤라인의 결혼이 성립되려는 찰나, 가톨릭 교회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결혼하기 위해 투쟁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을 맺게 된다. 그 즈음 마리 다구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셋째 아이까지 사망하고 연이은 불행을 견디지 못한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악장직을 사임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다 결국은 성직자의 직분을 받게 된다.

1830년대부터 1877년까지의 40여년의 파란만장한 리스트의 인생이 담겨 있는 작품이 세 개의 시리즈로 된 ‘순례의 연보’ 시리즈다. 순례의 연보 제1권은 리스트가 마리 다구 부인과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풍경들로부터 받은 영감들로 이루어 진 작품들이고, 제2권은 1837-1849년 사이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풍경, 시, 소설, 예술 작품 등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곡, 제3권 역시 이탈리아 편으로 리스트가 66세에 작곡되었다. 이 때 리스트는 연인과의 결별 및 두 아이의 죽음 후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접고 성직자의 직분을 받아, 세상의 쾌락과 성공이 아닌 보다 깊은 영적세계를 추구하는 그의 생각과 정신이 녹아져 있는 작품이다. 특히 3권에 수록되어 있는 ‘에스테 장의 분수’ 작품은 리스트가 로마 티볼리에 위치한 에스테 별장에 머무르며 쓴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리스트가 당시 추구한 숭고한 정신세계를 반영하듯 성경 말씀의 한 구절이 작품에 인용되어 있다.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리스트의 인생에서 사랑이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사랑하는 여인과의 만남들을 계기로 그의 삶의 방향은 전환되어 연주자에서 작곡가로, 때로는 훌륭한 교육자로, 그리도 더 나아가 숭고한 노년의 음악가로서 살게 된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각광 받고 있는 리스트의 음악은 결국 사랑의 환희와 고통, 인생의 고뇌와 극복의 과정들이 녹아져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