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21>

[의학신문·일간보사] 예술가의 삶은 영화의 좋은 소재다. 일상에 매몰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낭만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가들은 일종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주인공의 상당수는 화가들이며, 그중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많다. 지난 10년 동안 그를 소재로 한 영화는 국내에서 네 편 개봉되었으며, 영화를 제작한 나라도 미국,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다양하다.

고흐가 생전에 판매한 작품은 단 한점

알다시피 고흐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고, 화가로 활동한 기간도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당시 유럽 전위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는 겨우 2년 남짓 작업했다. 게다가 생전에 판매한 작품이라고는 단 한 점뿐이었다. 심지어 폴 세잔이 그의 그림을 보고는 미치광이의 그림 같다고 혹평했다니 당시 그의 그림을 대중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고 나서 얼마 후부터 어떻게 인정받기 시작하여,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자살 시도로 인한 복부 총상 후유증으로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당시 화상(畵商)이었던 테오는 1889년 4월에 결혼하여 아내 요한나 봉거와 갓 태어난 아들 빈센트 윌리엄 반 고흐와 함께 파리에서 살았다. 아들 이름을 빈센트라 한 이유는 형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형의 그림과 모든 유품을 돌보았다. 한편 봉거가 시숙인 고흐를 직접 본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인 1890년 봄이었다. 그러니까 고흐가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퇴원하여 요양차 파리 북쪽 근교의 오베르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고흐가 자살했으니, 그녀와 고흐의 인연은 참으로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파리 신혼집 아파트에는 고흐의 그림으로 가득했다.

테오는 형이 죽자 유작전을 개최하고자 했다. 고흐의 작품에 대한 동료 화가들의 평가가 좋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과 오간 수많은 편지도 정리해서 출판하길 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형이 죽은지 6개월 만에 그 또한 불귀의 객이 되어 뜻하지 않게 봉거가 이 모든 것을 떠안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어 갓난쟁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그녀에게 무명의 화가였던 시숙 고흐의 수많은 그림과 유품은 큰 짐이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짐만 되는 그림들을 미련 없이 처분하라는 충고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때마다 고흐를 작가로 널리 알리고자 했던 남편의 계획을 상기했다. 테오는 형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팔아 작품들이 흩어지는 것보다는 온전히 전작을 보존하길 원했으며, 그녀에게도 이를 주지시켰다. 그녀는 모든 것을 챙겨서 파리를 떠나 고향인 암스테르담 근처 부섬으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생계를 위해 하숙집을 운영하며, 고흐라는 화가를 알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가 부섬으로 간 이유는 당시 그 곳이 네덜란드의 예술인과 지식인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저명한 미술평론가인 얀 베스와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봉거는 그의 집을 ‘문명의 중심’이라고 했다. 그의 도움으로 봉거는 네덜란드에서 고흐의 작품을 1892년부터 1900년까지 20여 회 전시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흐의 유명한 ‘해바라기’ 같은 작품을 계속 출품하여 대중들에게 각인되도록 했다.

‘고흐 형제애’ 편지집 출간 감동 전해

다음 단계로 그녀는 고흐가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화가 에밀 베르나르와 그 외지인들에게 줄곧 조언을 받았다. 나아가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주요 화상들과도 접촉하여 고흐의 작품을 유럽 전역의 컬렉터들에게 연결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최종 목표는 고흐의 작품이 공공미술관에 소장되는 것이었다. 대략 10년간에 걸친 그녀의 노력은 여러 신문에서 고흐의 기사를 게재해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짐으로써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1901년 그녀는 네덜란드 화가와 재혼하였는데, 새 남편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고흐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잠시였다. 1912년 재혼한 남편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흐의 편지를 정리하는 일에 매진하여, 1914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들’이라는 제목의 편지집을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출간했다. 또한 편지집 출간에 맞춰 베를린에서 전시회도 개최하였다. 나아가 편지집 일부를 영어로 번역 출간하였는데, 영문 번역은 1925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지속하였다.

계수 헌신으로 대중 고흐작품 이해

고흐의 그림에 대한 생각과 감성이 생생하게 실린 편지집 출간으로 대중은 무명으로 죽은 고흐라는 화가와 낯설게만 보이던 그의 그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편지집 출간은 화가 고흐를 대중에게 ‘순수한 영혼으로 온전히 그림만을 그리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불운의 화가’이자 ‘동생의 애틋하고도 각별한 형제애 덕에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행운아’로 각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봉거는 편지집 출간 후 테오의 유해를 오베르 공동묘지의 고흐 옆으로 이장하여 형제가 나란히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했다, 이는 매우 극적인 장면으로, 지금도 이곳을 찾는 대중은 각별한 그들의 형제애를 기억하며 감동하게 된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고흐를 알리기에 전념하는 것에 대해 당시 미술계 일부에서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과 미술에 문외한이라는 이유로 비판했다. 하지만 그녀는 테오가 형의 작품을 관리하며 그녀에게 강조했던 점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생전에 900여 점의 유화 중 대략 190점의 유화와 1000여 점의 드로잉 작품 중 55점만을 팔았다. 그녀 사후에는 아들 빈센트가 삼촌의 작품을 관리하였는데 그는 1930년 자신의 소장품과 헬렌 크뢸러 뮐러의 소장품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함께 전시한 후 자신의 컬렉션을 시립미술관에 영구 대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지금 반 고흐 미술관의 고흐 컬렉션은 세계 최고로 200여 점의 유화와 1000여 점의 드로잉 그리고 750통의 편지를 소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요한나 봉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고흐가 있는 것이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통념과는 달리 고흐는 생전에 동료 화가들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헌신적이고 주도면밀한 노력이 없었다면 고흐 작 품의 진가를 아 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 있어야 대중의 사랑 받아

무엇보다도 편지집 출간은 일종의 스토리텔링이 더해진 것으로, 우리 미술계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세기 한국미술계에 김환기와 이중섭 같은 화가들이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기까지는 그들의 극적인 삶과 더불어 일기와 편지가 한몫했다. 작년에 132억에 낙찰된 김환기의 점화 ‘유니버스’는 그의 제작 일기와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드러난 것처럼 머나먼 이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심정이 작품의 아우라를 더한다.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그린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궁핍함 때문에 가족을 바다 건너 일본인 아내의 집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 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는 애틋한 가족 사랑에 우리는 더 큰 감동을 받는다. 좋은 작품과 더불어 극적인 삶을 더해주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작가가 대중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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