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9>

후기인상파 세잔·고갱·고흐Ⅰ

[의학신문·일간보사] 다시 서양으로 돌아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신은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주변 사람들은 타성에 젖어 안주하고자 하는 중심의 내부자들보다 그 틀과 제도를 냉정하게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신가의 삶은 가시밭길이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고갱은 “미술은 표절이거나 혁명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19세기 중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를 시작으로 인상파 화가들은 기성 아카데미즘에 반하여 눈으로 보는 현실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도 곧 혁신의 대상이 되었다. 인상파를 비판하며 혁신에 앞장선 화가들, 후기인상파가 곧바로 등장했다.

후기인상파에 속하는 대표 작가들은 세잔, 고갱, 고흐다. 1839년생인 세잔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출신으로 셋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다. 세잔보다 열 한 살 젊었던 고갱은 파리에서 증권 중개인으로 활동하면서 꽤 성공했으나,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자 전업 화가의 길을 선택했고, 종국에는 머나먼 타히티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갱보다 다섯 살이 어린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목사가 되려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물 아홉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어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약 900점의 유화 작품을 남기고 자살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주류였던, 순간의 인상을 포착해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던 인상파 화풍에 회의를 느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쿠르베와 더불어 인상파 화가들이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며 기성 화풍에 도전했다면, 이들은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며 시각에만 의존한 인상파 화풍을 혁신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각자의 구체적 지향점은 달랐으나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 주관적인 느낌을 더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 결과 그들은 20세기 서양미술이 추상화로 치닫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중에서도 세잔의 영향이 가장 컸다.

세잔은 20세기 서양 추상회화 창시자

20세기 입체파의 거두 피카소는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나의 하나뿐인 유일한 대가다”라고 했고, 야수파의 거두 마티스는 “세잔은 일종의 그림의 신이다”라고 했을 만큼 세잔은 20세기 서양 추상회화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대에 이렇게 거장으로 추앙받는 세잔이지만 생전의 그는 생애 말년 약 10년을 제외하고는 대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술계 인사들의 혹평에 시달리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그의 죽마고우인 소설가 에밀 졸라는 소설 ‘작품’에서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무능하고 실패한 화가로 묘사했는데, 그 모델은 다름 아닌 세잔이었다. 이 소설로 인해 졸라와 30년 우정은 파탄을 맞았다.

세잔은 살롱전과 인상파 전시에도 출품했으나 연이은 낙선과 혹평을 견디다 못해 1877년 “사과 한 알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라고 다짐하며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1895년 쉰여섯 살에 파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할 때까지 고향에 은둔하며 그림만 그렸다. 세잔은 매우 비사교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일례로 그는 이사할 때 누구에게도 새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첫 개인전을 열었음에도 오프닝에 참석하지 않고 고향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림을 그렸다.

아무튼 늦은 나이에 개최한 개인전이었으나 평단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화가신문’에 게재된 글은 “적법하게 허가된 짓궂은 장난의 범위를 벗어난, 유화에 가해진 참혹함의 지긋지긋한 광경”을 고발한다는 혹평이었다. 기성 화단의 이러한 평가를 고려하면 세간에 떠도는 ‘세잔의 앵무새’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즉 세잔의 화실에 들어서는 이들은 하나같이 놀랐다고 한다.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세잔은 위대한 화가다, 세잔은 위대한 화가다!’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침은 사람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세잔이 키우던 앵무새 목소리였으며, 세잔은 천연덕스럽게 ‘내 전속 미술평론가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성 화단의 혹평과 달리 세잔은 신세대 미술인들에게는 진정한 대가였다. 이는 모리스 드니가 1900년에 그린 ‘세잔에 대한 경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그림을 1870년 앙리 팡탱라투르의 그림, 마네가 젊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어떤 위상에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바티뇰의 아틀리에’와 비교해 보면 세잔의 성격과 위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두 대가가 살아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마네는 젊은 인상파 화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어떤 그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반면에 ‘세잔

에 대한 경의’에는 세잔이 없고 고갱이 소장한 세잔의 정물화가 정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주위로 젊은 화가들과 화상 그리고 평론가가 둘러서서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그림 속 장소는 바로 당시 파리의 유명한 화상이자 전위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볼라르의 화랑이다.

무엇이 젊은 화가들을 열광하게 했나?

세잔의 무엇이 그토록 젊은 화가들을 열광케 한 것일까? 그에게 “예술이란, 사물을 자신의 욕구와 취향에 맞게 받아들이는 작업”이며, “그림이란 느낌들을 조합하는 예술이다.” 또한 “자연을 본다는 것은 모델에서 특징을 추출하는 것이다. 그림이란 대상을 엄밀하게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조화를 찾는 것이며, 그것들을 새롭고 독창적인 논리로 다시 배열하는 것이다.” 한편 자연 만물은 공, 원뿔, 원기둥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세잔의 이와 같은 견해는 ‘세잔에 대한 경의’를 그린 모리스 드니를 거쳐 20세기 서양미술에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드니는 “회화는-전쟁터의 말이나 누드의 여인 또는 하나의 일화이기 이전에-본질적으로 어떤 일정한 질서에 의해 색으로 덮인 표면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화가 세잔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오전 6시부터 10시 반까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집에 와 점심을 먹고 곧바로 생트 빅투아르 산으로 가 풍경을 그린 후 오후 5시에 귀가하여 저녁을 먹고는 즉시 잠자리에 드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그 외의 일이라고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를 지켜본 청년 화가 에밀 베르나르는 “세잔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닌 오로지 진리뿐이었다. 그는 보이는 것과 논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자신의 의지를 극단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하늘이 준 재능을 억제했다”라고 회상했다.

세잔은 자신의 첫 개인전을 개최해 준 화상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하며 “사과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볼라르가 무려 백번 넘게 모델을 섰지만, 이 그림은 끝내 미완성이 되었다. 그가 “사과 한 알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살피게 되는 대목이다. 그는 형상과 색채로 알고 있는 사과가 아닌 진정한 사과의 본질, 즉 ‘사과성’을 집요하게 탐구해나간 사색가였다.

참고로 2016년 국내에서도 개봉한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보면 아름다운 엑상 프로방스의 풍경과 함께 그와 에밀 졸라와의 관계, 그리고 화가로서의 삶을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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