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18>

피아니스트 김윤경의 클래식 편지


루드비히 본 베토벤(Ludwig von Beethoven)
(1770-1827)

[의학신문·일간보사]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온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해당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괴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듯, 시련은 개인의 맞춘 양복처럼 각자의 인생을 침범한다. 물론 어느 누가 겪어도 ‘감당하기 벅찬’ 소위 초강도의 고난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어쩔수 없이 직면해야 하는, 마치 피할 수 없는 파도같이 각자에게 몰려온다.

필자 역시 그런 어려운 시기가 여러 번 있었다. 중학교 때에는 양 손목에 부상을 입어 6개월 동안 피아노를 치기는 커녕 글씨도 못쓰고 컵도 못 드는 상태로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해야 했었고, 대학원 입시 때에는 오른발을 심하게 다쳐 오랜 기간 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박사 유학시절 첫 학기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들과 더불어 팔에 부상을 입은 상태로 한 달 남은 독주회를 준비해야 했었는데, 그 때 내 인생을 더욱 고통과 기쁨을 더해 준 작품이 바로 베토벤이 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 작품 111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는 그가 죽기 6년 전인 1821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는 운명에 대한 저항과 고통, 절망이 희망으로 초월하는 문을 통하여 천상에서 누릴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작곡가의 깊은 영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청력을 잃기 시작한 28세 베토벤 선택은?

그는 어떤 역경의 소용돌이를 만난 것일까? 이미 다수에게 알려진 것처럼, 베토벤이 청력을 잃기 시작한 시기는 1798년으로 28살의 작곡가가 막 빈의 떠오르는 스타로 등극하여 귀족 사회에 입문하기 시작할 때였다. 불과 몇 년 후인 1802년에 그는 심각해지는 청각문제와 더불어 음악가로써 견디기 어려운 좌절감에 허덕이다, 하일리겐슈타트 지방에서 요양을 하며 일명 자살 유서인 ‘하일리겐슈타트 유서(Heiligenstadt Testament)’를 쓰게 된다.

후대에 감사하게도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쳐온 인생을 헤쳐나가며 맞서기 시작한다. 그 이후 그의 작품들 안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며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한 거장을 만날 수 있다.

갑작스럽게 닥친 거대한 운명과의 싸움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은 바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클래식 곡이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 교향곡 5번(1807)이다. 이 작품은 다단조(C minor)의 유명한 네 음- 솔솔솔 미-로 시작하여 첫 소절부터 엄청나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다. 베토벤이 그의 제자 쉰들러(Anton Schindler)와의 대화 중, 곡의 서두를 가리키며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한 것이 전해져 지금의 ‘운명’ 교향곡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불행이라는 이름의 “운명”이 자신의 삶을 “쾅쾅쾅쾅” 두들긴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주제(motif)가 단순하고 음악 안에 있는 드라마틱한 요소들, 즉 절망과 희망, 고통과 행복, 선과 악의 대조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기에 베토벤의 다른 교향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상하기 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교향곡’ 루터의 위대한 성시와 흡사

베토벤 교향곡에 대한 깊은 성찰로 잘 알려진 나성인 작가의 저서,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에서는 ‘운명교향곡’이 루터의 위대한 성시 ‘내 주는 강한 성이요’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루터의 시, 제1연에서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이후 대적 사탄을 막강한 권능과 많은 모략을 가진 강력한 존재로 묘사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제4연에서는 거대한 적과의 싸움에서의 승리,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대적들은 이 말씀에 손을 대지 못하고…/주께서 우리 땅 위에 함께 계시니…/대적이 우리 육신과 재산과 명예와 아이와 아내를 앗아간다 해도…그들이 얻는 것은 없으리니/주의 왕국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임하시리라”

2020년 3월,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는 거대한 (역설적이게도 아주 미세한) 공동의 적과의 싸움으로 진통하고 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겪었고, 결국 매번 잘 이겨 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마치 베토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온 운명에 맞서 투쟁한 후 승리의 기쁨을 맛 보았 듯, 그의 ‘운명교향곡’을 통해 우리 또한 새 힘을 얻고 두려움과 좌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설명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시면 음악을 통한 베토벤의 메시지를 더욱 명백히 느낄 수 있을 듯하다.

1악장. 전투적인 악장이다. 끊임없는 갈등, 운명과 같이 몰아치는 고통의 주제가 다양한 악기로 연주된다.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운명’이 계속 나를 쫓아다니며 ‘이게 네 현실이야!’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 거대한 싸움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는 자신을 볼 수 있다.

2악장. 1악장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이다. 모든 악기가 ‘운명’ 주제라는 완강한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악장에 비하여, 각자 악기들이 솔로를 연주하는 ‘자유’를 살짝 엿볼 수 있다. 비올라와 첼로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듯한 선율로 시작하는 서두는 “무슨 일이 있었나”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유튜브 채널 “김윤경의 소소한 클래식”에서 다양한 음악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3악장. 어둡게 시작하는 3악장에서는 ‘운명’ 주제가 다시 호른으로 제시된다. 두개의 주제가 번갈아 나오며 갈등이 고조된다. 마치 운명과 뒤엉켜 씨름을 하는 것처럼. 그 후 현악기의 활발한 움직임을 토대로 긴장감이 쌓이면서, 4악장의 승리를 예견하는 팡파르로 이어진다.

4악장. 가장 긴 악장으로써, 운명을 직면한 갈등과 싸움을 딛고 결국 승리에 다다르는 과정을 나타낸다. 베토벤이 투쟁하며 지킨 믿음, 즉 ‘고난 후 승리’의 뜻이 실현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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