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6>

인상주의 Ⅰ

[의학신문·일간보사] 1874년 4월 15일 카푸친 대로에 있는 사진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드가, 모네, 르노아르, 모리조, 피사로, 부댕 그리고 세잔 등 일군의 무명작가들이 함께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들이 ‘인상파(Impressionism)’라 불리게 된 것은 이 전시를 본 화가이자 극작가이고 미술비평가로 활약한 루이 르로이(Louis Leroy)가 4월 25일자 잡지 ‘샤리바리(Le Charivari)’에 모네의 출품작인 ‘인상, 해돋이’를 빌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라는 제목의 전시 리뷰를 게재한 데서 비롯되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1872년 센강하구에 있는 르 아브르(Le Havre) 항구의 해돋이 풍경을 그린 유화로 48×63cm의 비교적 작은 그림이다. 해무가 자욱한 아침, 항구에서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항구에 있는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고, 우측에는 정박한 배 혹은 건물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바다 위에는 노 젖는 배가 하나 있고, 그 뒤에도 배 한 척이 있는 듯하다. 이같이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친 붓 자국을 그대로 남긴 채 그 어느 것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경을 옅게 칠해 캔버스 천이 비치는 곳도 있으나, 붓으로 그린 것들은 임파스토(impasto) 기법-유화물감을 두텁게 칠해서 질감과 입체적인 효과를 내는 기법-으로 그려 붓놀림의 생생함을 더해준다. 하지만 해돋이 인상은 주홍빛 태양과 함께 바다 위에 쌓은 듯 표현한 주홍색 짧은 붓 터치가 푸르스름한 파스텔 색조의 배경과 어우러져 일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 그림을 보면 오로지 해와 배만 확인할 수 있다. 밑그림 없이 바로 붓으로 스케치하듯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살롱전과 정반대 그림 그려 ‘평가’ 상반

그가 전시 참여작가들을 인상주의자라 부른 이유는, 기존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전시 작품들은 한결같이 인상만을 스케치한 미완성 상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상주의자’라는 표현은 전시 작품들을 폄훼하고 희화화하는 함의(含意)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혹평과 달리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에드몽 뒤탕티(Edmond Duranty)는 1876년 ‘제2회 인상파전’을 보고 쓴 에세이 ‘새로운 회화(La Nouvelle Peinture)’에서 그들의 그림은 모던한 삶을 혁신적인 스타일로 묘사한 그림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드가의 친구였으며, 카페 게르부아에 모임에도 자주 함께했다.

이처럼 인상파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었던 까닭은 그들이 살롱전 심사기준과 정반대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살롱전 심사기준에 따른다면 완성된 그림은 정확한 소묘를 바탕으로 명암법에 따라 붓 터치 없이 매끄럽게 개체를 묘사해야만 했다. 그리고 캔버스 천이 보이지 않게 완벽하게 칠해야만 했다. 특히 그들은 색채보다는 소묘를 중요시했다. 사생하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강한 인공조명에 의지해 그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사진과 같이 세밀한 그림을 추구했다. 따라서 가까이 가서 볼수록 손으로 그린 흔적이 없어야만 했던 것이다.

인상파 그림 특징은 짧고 거친 붓 터치

인상파 그림의 공통된 특징은 정확한 소묘에 관한 관심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짧고 거친 붓 터치를 강조했다. 그래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금기시했던 순색을 그대로 사용하여 빛의 효과를 강조했다. 특히 그들은 밝은 부분과 그림자에도 관례에 어긋나게 유채색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특징들은 즉흥성을 강조한 것으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화실에서 그리던 전통과 달리 야외에서 사생하면서 빛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그들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 외광파(外光派)는 바로 그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드가처럼 그들 그림의 화면 구성은 파격이었다. 그림의 소재 또한 도시풍경부터 일상생활 속의 사람들 등 동시대 삶에서 찾았다.

이 같은 급격한 변화는 시대상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다. 무엇보다도 19세기 파리는 중세도시에서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파리는 루브르 성과 시테 섬을 중심으로 좁은 골목길이 미로같이 얽힌 전형적인 중세도시였다.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3세는 1853년 파리 시장에 오스만 백작을 임명하고 파리 개조사업을 진행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19세기 초에 전천후로 쇼핑할 수 있는 아케이드가 등장했고, 1852년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봉 마르셰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또한, 파리에서 1855년을 시작으로 1867년, 1878년, 1889년, 1990년에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그야말로 파리는 19세기 유럽 문화의 수도가 되었다. 시인 보들레르는 1863년 발표한 글 ‘현대 삶을 그리는 화가’를 통해 화가들에게 이 같은 변화를 그림에 담아낼 것을 촉구했다.

안료·튜브 개발 등 과학의 발전도 한몫

과학의 발전도 한몫했다. 17세기에 뉴턴이 프리즘으로 자연광을 분해하며 색연구가 시작됐다. 18세기는 산업혁명으로 방직업이 발전하며 염색산업도 성장하게 됐다. 따라서 비싼 천연염료 대체물을 찾기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더불어서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 영향으로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면서 색연구가 가속도를 내며 새로운 안료들이 개발되었다. 그 결과 값싸고 질 좋은 원색 안료가 생산되어 화가들도 좀 더 다양한 색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미셸외젠 슈브뢸의 색채 조화론이 정립된 것도 이즈음이다.

여기에 더해 물감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 등장했다. 바로 1841년 미국의 존 랜드가 유화물감 용기로 튜브를 개발하여 특허를 획득한 것이다. 마치 나폴레옹 전쟁 당시 개발된 통조림으로 음식 보존 기한을 획기적으로 늘린 것처럼, 화가들은 물감을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튜브 이전에 유화물감을 보관하는 용기는 터지기 쉬운 돼지 오줌보였기 때문이다. 튜브에 든 물감이 생산되며 일어난 가장 커다란 변화는 휴대하기 편해졌다는 점으로, 야외에서 사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화가는 물감을 만들기 위해 개인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 없이 그림 그리는 본업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이다. 1854년 일본이 개항한 이후 일본 그림과 장식품들이 유럽에 전래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일본이 1867년 파리박람회에 참여하기 전부터 파리에서는 우키요에와 공예품을 파는 상점이 생겼다. 마네부터 반 고흐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인상파 화가들은 이국적인 우키요에의 색감과 구도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인상파의 탄생에는 이러한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 천사를 보지 못해 천사를 그릴 수 없다고 한 쿠르베, 앞서 살펴본 마네 그리고 파리 남쪽 시골 마을 바르비종에서 ‘만종’과 ‘이삭줍기’를 그린 밀레와 같이 살롱전의 권위에 저항한 그림을 그린 선배들이 있었기에 인상파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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