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준 교수 의학신문 신년 수필

유형준 CM병원 내분비과/한림의대 명예교수

[의학신문·일간보사] 동네 어귀에서 십년 가까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근근이 빵을 만들어 오던 가게 이름이 바뀌었다. 사람 이름 대신에 얼핏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 어려우나 발음이 그럴듯하게 입안에 머무는 외래어로 간판이 바뀌었다. 주인은 그대로인데 가게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5년 ‘이명래 고약’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본인 성명 상표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성명 상표 출원이 계속 증가한다는 특허청의 통계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주변에 본인의 이름을 걸어놓은 가게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실명 간판이 증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는 이미 등록되어 있는 상표와 중복될 확률이 낮아져서 한 번에 쉬이 등록될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또 하나는 상표의 인지도와 신뢰도를 높이기가 비교적 수월해서다. 자신의 명예로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우선 믿음을 돋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에는 자신감을 보다 중시 여기는 개인정체성 강세의 시대 분위기도 한몫 단단히 거들고 있다. 대세의 흐름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동네 빵가게는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이란 무엇일까?’ 역사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종교학, 생활문화사학 등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일본의 ‘21세기 연구회’는 질문을 던진다. 연구회는 세계 여러 곳의 인명의 의미를 찾아 『인명으로 보는 세계사』(이영주 번역)에 담고 있다. ‘옛 중국에는 이름이 타인에게 알려지면 재앙이 덮친다거나 타인의 실명을 직접 부르는 것은 실례라는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실명을 아껴두고 호(號), 자(子)를 따로 지어 대용으로 썼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 ‘약속을 어기면 성(姓)을 간다.’는 말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약 사천 년전 중국에 훌륭한 황제로 칭송받는 요임금이 있었다. 요임금은 신하들로부터 온 백성이 태평하고 나라가 성대하다고 늘 들으니 안심하면서도,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백성들의 복장으로 변장하고 궁궐을 몰래 나섰다. 마침 한 골목에서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뛰어 놀고 있었다.

요임금은 적이 안심하며 궁궐로 돌아갔다. 황제의 정치력, 황제의 이름을 죄다 담은 황제의 힘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즐거이 노래하는 백성들의 믿음은 바로 요임금의 안심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을 평안케 한 것은 황제의 이름이 아니라 황제에 대한 믿음이었다.

뭇백성이 살아가는 건 / 모두 당신 덕택이요. / 알지 못하는 사이에 / 황제의 법칙에 따르고 있네. (立我烝民 莫匪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입아증민 막비이극 불식부지 순제지칙)
요임금은 좀 더 둘러보다가 잔치를 벌이듯 많은 사람들이 푸짐한 음식을 차려 놓고 놀고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그들은 배불리 먹어 불룩 나온 배를 북처럼 두드리며 땅을 구르면서[鼓腹擊壤 고복격양] 노래 부르고 춤추고 있었다.
해가 뜨면 열심히 일하고 해가 지면 편히 쉬는구나. /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배불리 먹누나. / 황제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나. (日出而作 日入而息 / 鑿井而飮 耕田而食 / 帝力何有於我哉(일출이작 일입이식 착정이음 경전이식 제력하유어아재)

초대 대통령 시절, 서울의 명칭을 서울에서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자 ‘수도명칭연구회’를 구성하여 진행시켰던 적이 있다. 그 의도를 1956년 1월 7일 일간지 《경향신문》은 ‘우남이 제1위’란 제목으로 전하고 있다. ‘「수도명칭을 무엇이라고 고치느냐」를 검토하기 위해 그 동안 여론조사를 해오던 서울특별시에서는 5일 현재 ‘우남’이란 이름이 제일 많았다고 발표하였다. ---중략 ---시에서는 곧 동여론 조사를 국무회의에 보고할 것이라 한다.’ 우남(雩南)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다. 그러나 ‘우남특별시’로의 변명(變名)에 반론이 들끓었다. 집권당 어느 의원조차 “시골 사람들이 서울 사람 욕할 때 ‘서울 놈, 서울 놈’하는데, 서울이 우남시가 되면 ‘우남 놈, 우남 놈’하지 않겠나.”라며 반대했다. 이 대통령조차도 “내가 대통령으로 앉아서 서울 이름을 내 별호인 우남으로 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물러섰다. 수도 명칭 변경은 결국 흐지부지됐다.’(조선일보, 2014. 2. 24.)

원래 이름[名, 명]이란 저녁 석(夕) 자 아래에 입 구(口) 자를 받친 글자로, 저녁 어스름에 흐릿해진 모습으로는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워 입으로 소리내야 알 수 있다는 뜻에서 생겨난 글자다. 따라서 훤한 대낮에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차리기 때문에 부르고 불릴 필요가 없다. 굳이 제 이름을 드러낼 필요가 전연 없다. 하고자 하는 일의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또한 그 켯속을 도무지 알 수 없이 제 이름을 걸고 우기는 행실은 우격다짐일 뿐이다. 실속이 없거나 사실 이상으로 멋을 부린다면 결과는 뻔히 부명(浮名)이다. 설령 당장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차피 그 이름도 그 이름 걸고 덤비는 일도 허허(虛虛)롭다. 고금동서를 통하여 드레진 이의 생각과 행실은 이곳저곳에 명패를 걸지 않아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은근히 힘을 발휘하고 영향력을 미친다. 상표특허 전문가의 말을 빌린다. ‘이름을 내건 만큼, 상표 등록 자체 보다 상표를 붙이고 있는 제품의 품질을 강화하여 신뢰를 쌓고 지속적으로 쌓아가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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