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3>

그림과 사진 Ⅱ

[의학신문·일간보사]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정부는 화가 출신인 루이 다게르가 개발한 다게레오 타입 사진술을 특허로 공인했다. 이는 사실 프랑스 정부가 서두른 감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사진술이 연구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랑스 의회에 사진 발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한 아라고는 국가가 다게르에게서 사진술의 특허권을 사들이고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사진의 놀랄만한 정확성과 실용성을 꼽았다. 이는 앞으로 고고학과 미술에 크게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제반 과학에도 도움을 주리라고 내다봤다. 특히 사진의 정확성은 가장 뛰어난 화가의 작업보다도 나을 것이라 했다.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서 사진전 개최

한편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사진을 그림과 동등하게 미술로 수용할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1839년 1월 7일 다게르의 사진술 시연을 본 화가 들라로슈는 “오늘부로 회화는 죽었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그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신고전주의 화풍의 역사화를 낭만주의적 감성으로 해석해서 일반 대중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사진 같이’ 그린 화가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사진술은 대중에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발명 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훨씬 더 빠르
고 선명하게 찍을 수 있게 개량됐다. 따라서 사진 찍는 비용은 저렴해졌고, 시간도 단축되어 대중은 이전에는 꿈꾸지도 못한 자신의 초상화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초상사진은 대단한 돈벌이가 되었으며, 사진술은 급속도로 산업화하였다. 따라서 사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 결과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사진 전시회가 개최되었고(물론 미술작품과 ‘함께’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1859년에는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등용문인 살롱전에도 사진 부문이 개설되었다.

미술계 논란 속 사진술 대중에 큰 호응

이즈음 들라로슈와 달리 냉정하게 사진과 그림의 차이를 살펴 각자 추구해야 할 미학을 예견한 화가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들라크루아다.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로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여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들라크루아. 그는 1853년 10월 12일에 쓴 일기에 임종을 맞는 여인을 살펴보는 사람과 카메라의 시선을 가정해서 그림과 사진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두 시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은 상상력을 통해 흥미로운 것만 보고자 하지만,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자다운 분석이다.

(1)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유화, 289x222cm, 1850,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England (2)위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유화, 325x260cm, 1830,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루와는 나아가 “한 천재가 다게레오타입 사진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사용하면,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사진은 자연의 진실한 데생에 대한 확실한 증명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사진의 단점이 화가에게는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데 참고할 수 있다고 봤으며, 자신도 사진을 활용했다.

한편 1856년, 초기 사진사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주장한 작가로 널리 알려진 나다르는 사진술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으나, 빛을 읽는 감각과 초상사진 모델의 개성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는 작가 스스로 익혀야 함을 강조하였다. 바꿔 말하면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으나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화가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감각, 즉 천부적인 직관력이 필요하기에 사진도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그가 사진가 이전에 저널리스트이자 만화가로 활동한 이력과 더불어 1874년의 첫 번째 ‘인상파’전이 그의 스튜디오에서 열렸을 만큼 많은 예술인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열기구를 타고 파리 상공에서 인류 최초로 항공사진을 찍은 당대에 매우 특이한 사진가였다.

(3)도미에의 『사진을 예술로 승격시키는 나다르』 리도 그래프, 1862 (3-1)나다르, 왼쪽 미술 전시장에 작은 공간을 묻는 사진 1855, 오른쪽 미술 전시장에서 쫓겨나는 사진 1857
(4)1855년 나다르가 찍은 보드레르 (5)앵그르, 『황제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 유화, 259x162cm, 1806, Musée de l'Armée, Paris

미술계는 여전히 사진을 예술로 불인정

그러나 미술계에서는 여전히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다르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시인 보들레르가 1859년 살롱전에 전시된 사진작품들을 보고 쓴 비평문 ‘현대 대중과 사진’을 보자. 보들레르는 사진으로 인해 “정확성에 대한 과도한 취향이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억압하고 질식시킨다”라고 하며, 사진이 “게을러서 작업을 완성할 수 없는 화가나 재주 없는 화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개탄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은 “그나마 희소하기 짝이 없는 프랑스의 예술적 천재성을 황폐하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해 왔다”라고 혹평했다. 그러고는 “사진은 마땅히 자신의 원래 역할”, 즉 “예술과 과학의 시녀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런데도 그는 나다르의 모델이 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무튼 보들레르의 바람과 달리 1862년 법원은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전시하는 것을 허가했다. 화가 도미에는 이런 상황을 나다르가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파리 시내를 찍는 풍자화로 희화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들라크루아와 달리 아카데미즘을 고수하며 사진 같은 ‘나폴레옹 1세’ 초상화를 그린 보수적인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이 같은 법원 허가에 맞서 ‘사진이 미술과 동일시 되는 것을 반대하는 예술가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훗날 행해진 데이비드 호크니의 연구에 따르면 앵그르도 정밀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틀림없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 ‘순간 예술’-그림 ‘추상화’ 길 걸어

여러 저항이 있었지만 1874년 첫 번째 인상파전이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개최된 바와 같이, 사진과 그림은 공존하며 각자의 미학을 찾아 나갔다. 사진은 순간의 예술로 사진적 진실을 추구해 나아갔고, 그림은 그림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고 답하며 추상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시작은 ‘현대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느라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사진술의 등장은 그림의 존재 이유를 그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게다가 1895년에는 활동사진, 즉 영화까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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