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12>

그림과 사진 Ⅰ

[의학신문·일간보사] 동서양의 전설적인 화가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신라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벽화에는 참새가 날아와 앉으려다 부딪쳐 낙상했고, 고대 그리스의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 그림에도 새가 먹으려 달려들다 부딪쳐 기절했다. 얼마나 실제 같았으면 새들의 눈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그리기 위해서는 눈으로 본 것을 손으로 완벽하게 그릴 수 있는 각고의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좀 더 쉽게 그릴 수 있는 도구를 꿈꿔 왔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동서를 막론하고 화가들은 실물처럼 보일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개발해 왔는데, 특히 서양에서 이 일에 몰두했다. 흔히 14~16세기 서양 르네상스 미술의 최대 발명품 두 가지를 꼽으라면 선형 원근법과 유화를 꼽는다. 기하학 원리에 기초한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세밀한 묘사와 손쉽게 수정할 수 있는 유화의 조합으로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생생함은 이전에 회칠한 벽에 그린 프레스코화나 달걀노른자에 물감을 개서 그린 템페라로 그린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다.

<도판1> 카라바조 ‘엠마오에서 저녁 식사’ 1602~3, 캔버스에 유채, 141x175cm, 내셔널 갤러리, 런던(오른쪽에 팔 벌린 제자와 가운데 앉은 예수의 팔에서 놀라운 원근법 효과를 볼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의 오른손이 오른쪽 제자의 오른쪽 손보다 앞에 있으나 손의 크기가 거의 같다. 게다가 오른쪽 제자의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 커 보인다. 이런 오차는 제한된 심도로 인해 초점을 다시 맞추느라 렌즈와 캔버스를 이동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호크니의 분석이다.)

그런데 15세기 초 플랑드르, 지금의 네덜란드의 남부에서 프랑스의 북동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사진 같이 극사실적으로 그린 자연주의 화풍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유화를 처음으로 그린 화가로 알려진 얀 판 에이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사진처럼 정밀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의 정밀한 묘사는 ‘사진’이라고 말해도 누구나 믿을 듯하다. 그의 묘사력은 실로 천재적이다.

한편 에이크가 활약할 즈음부터 갑자기 많은 화가들이 그렇게 정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극사실적 자연주의 화풍은 점차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로 확산됐다. 그리고 이 시기에 꽃과 과일 그리고 사냥한 동물을 매우 세밀하게 그린 정물화가 등장한다. 이를 우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광학기술을 고려하면 눈과 손만으로 그려야 할 화가가 어떤 도구를 이용해서 그와 같이 정밀하게 그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같이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미술사학자들이 극사실적인 자연주의 화풍이 플랑드르 지방에서 특정 시기에 등장한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한 시각 체험을 연관 지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도구로 광학기기를 사용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심증만 가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데 광학기기를 사용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유럽에서 광학기기의 발명은 11세기 아랍의 물리학자 알하젠이 쓴 ‘광학’이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가능해졌다. 13세기에는 그가 규명한 카메라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 즉 바늘구멍사진기 원리를 토대로 천문 연구와 오락을 위해 실제 카메라 옵스큐라가 제작 사용되었다. 또한 돋보기 렌즈를 만들어 초기 형태의 안경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노트에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를 실험한 기록을 남겼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실제 그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2003년에 개봉한 같은 제목의 영화에서 베르메르가 훗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모델이 되는 하녀에게 자신의 화실에 설치한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명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신기해하며 어떻게 그림이 그 기계 안에 들어갔냐고 물어보고는 이내 이게 뭘 그릴지 보여주냐고 묻는다. 그는 도움은 된다고만 답한다. 물론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그림은 문서와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면 화가가 어떻게 그렸는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경험 많은 화가의 눈이 필요하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오랜 연구 끝에 15세기부터 상당수의 거장이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광학기구, 즉 카메라 옵스큐라와 렌즈 그리고 거울을 사용했음을 밝혀냈고 이를 2001년 책으로 출간했다. 당연히 눈과 손의 천재성을 신봉하는 미술사학자들과는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호크니는 당시 화가들이 정확한 밑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였음을 실증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여러 명화를 살펴 당시 화가들이 어떻게 커다란 그림을 작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 그렸는지도 알아냈다. 마치 여러 장의 작은 사진을 이어 붙인 기법이었는데, 그는 예리한 화가의 눈으로 여러 그림에서 어색한 이음새와 각각의 사물에 서로 다른 시점이 적용된 것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2013년에 미국 텍사스 출신의 발명가 팀 제니슨은 호크니의 연구결과에 힘입어 베르메르가 어떻게 사진 같은 그림을 그렸는지 실증했다. 아마추어 화가인 그는 베르메르의 ‘음악수업’ 그림 속 실내 풍경을 실제 공간에 재현해 놓고 다시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를 기초로 렌즈와 거울을 조합한 광학기기를 사용해서 그 그림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이 과정을 기록하여 ‘Tim’s Vermeer’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개봉했다.

광학기기는 점차 작아졌다. 1806년에는 휴대하기 간편하면서도 밝은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 루시다가 발명되었다.

참고로 카메라 옵스큐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고, 카메라 루시다는 ‘밝은 방’이다. 마침내 1839년 1월 7일 사진술의 아버지로 알려진 루이 다게르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가 공동으로 개최한 모임에서 사진술을 소개했고 8월 19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특허를 공인받았다. 그런데 다게르 역시 화가였다.

그러면 오랜 시간 갈망하던 그림 그리는 기계, 사진술이 등장한 이후 서양 미술은 어떻게 요동쳤을까. 우선 화가들은 존재감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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