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병원 개원 120주년을 돌아보며

[의학신문·일간보사]

어떤 나라 이야기

먼저, 어떤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다. 이 이야기가 도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일까 짐작해 보시기 바란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절대로 지어낸게 아니다.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이다. 처음 배를 타고 온 외국인들이 멀리서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 마치 하얀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사람들의 옷이 모두 하얀색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결혼식 이야기이다. 신랑 신부는 서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식 날에도 신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어 신랑은 신부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이 나라에는 침대가 없다. 사람들은 보통 그냥 맨 바닥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잠들면 흉측하게 생긴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서 방바닥을 끈질기게 돌아다닌다.

이 나라 사람들의 전통적인 치료법 이야기이다. 남편이 중병에 걸리면 아내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에게 먹이기도 한다. 자식들도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부모에게 피를 마시게 하기도 한다. 피부가 빨갛게 변하는 ‘단독’이라는 병에 걸린 아이의 치료법은 돼지를 잡아 머리와 다리를 잘라낸 후, 배를 갈라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그 속에 집어넣고 돼지를 꽁꽁 묶는 것이다.

예수병원을 설립한 마티 잉골드가 진료하기 위해 말을 타고 가는 모습

다음은 좀 더 무서운 이야기이다. 죽은 가족을 매장할만한 돈이 없는 사람은 땅에 박은 말뚝 위에 관을 놓고 마른 풀로 덮는다. 땅에 묻히지 못한 시신들은 나중에 땅 위에서 썩게 되고, 뼈들은 굴러다닌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이가 천연두로 죽으면 시신을 마른 풀로 감싸 나무에 묶어 놓는다. 왜냐하면 천연두는 귀신이 들어와서 생긴 병이기 때문에 죽은 아이를 땅에 묻으면 귀신이 들어갈 몸을 찾지 못해 대신 가족 중 누군가에게 들어가고 그 사람도 죽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들이 어느 나라 이야기 인지 대충 짐작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병원 설립자 잉골드가 쓴 일기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 나라는 바로 120년 전 우리나라이다.

120년 전 대한민국 모습

당시 우리나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잉골드가 한국에 오기 3년 전인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다음해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했다. 잉골드가 온 지 13년 후 한국은 일본 식민지가 됐고, 22년 후에는 고종황제가 독살을 당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의 우리나라 보건위생 상황은 아주 끔찍해서 1902년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매일 수백 명씩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이남 최초 의사 마티 잉골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30세 처녀 의사 잉골드는 1897년 한국에 도착했다. 한강이남 최초의 의사인 잉골드는 이후로 28년간 이곳에서 의사, 전도사, 교사, 문서선교 등 여러 역할을 했는데, 그녀의 업적은 모두가 한강이남 최초의 기록이다.

잉골드 일기를 몇 대목 살펴보면 “1898년 11월 3일, 진료소에서 첫 진료를 시작했다. 오늘은 지난해에 내가 전주에 도착한 날이다. 첫날에 환자 6명이 와 시작이 좋다” “1898년 9월 1일, 나에게 뼈가 탈골된 8살 먹은 아이를 데려와 처음으로 마취제를 사용해서 수술을 했는데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1900년, 전주성 안에 사는 정부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사람을 보내 아내를 위한 왕진을 요청했다” “1902년, 나는 6개월 반동안 진료소 문을 열어 환자 1586명을 진료했다. 그리고 시간과 힘이 허락되는 한 더 많은 왕진을 하려고 노력해 52가정에 150차례 왕진을 다녀왔다.”

처음에는 외국인을 혐오하고 조롱했던 전주 사람들은 잉골드가 아픈 사람을 정성껏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점차 신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저 여자 의사는 워낙 용해서 아픈 사람을 그저 슬쩍 보기만 해도 환자의 병이 낫는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호남 근대화의 초석

풍요가 넘치는 미국 땅에서 존경받는 의사로서 모든 세속적 욕망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이땅에 온 잉골드는 이 모든 한계상황을 이겨내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기도를 드렸다.

1899년, 시골 마을로 전도여행을 갔을 때에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풍성함을 가르치는 것은 큰 기쁨이며 특권이다. 때로 많은 육체적인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괴로움 또한 기쁨이다”라고 기록했다.

잉골드는 또 이렇게 썼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러왔고 그러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졌다. 전도는 진료소에서 매일 이루어졌기 때문에 환자들은 이것도 진료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모든 환자들은 전도용 소책자를 받았고 많은 찬송가와 교리문답서가 팔렸다. 환자들은 가장 가까운 교회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 참여에 초대를 받았다.” 잉골드는 이곳에서 의료, 선교뿐만 아니라 교육, 정신, 도덕적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호남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혁명적 변화의 시작

잉골드 일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 “성격이 밝고 아주 예쁜 김 양은 소녀 성경반을 졸업하고, 주일학교 교사가 됐다. 소년 성경반에서 교사를 맡고 있는 박 군은 그녀의 매력에 무릎을 꿇었고 양쪽 부모의 허락을 받아 약혼을 했다. 그들은 당연히 서로에 대해 알기를 원해 결혼 전부터 교제를 했다. 물론 이것은 한국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새로운 풍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다음은 미국 선교잡지에 실린 글이다. “하루는 잉골드가 이웃 마을에 왕진을 하러 자전거를 타고 좁은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그녀는 끝이 없는 사역을 생각하느라, 자전거 두 바퀴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다. 그 순간, 갑자기 덤불 사이에서 한 아이가 튀어나와 의사, 아이, 자전거, 먼지가 뒤엉켜서 굴렀다. 잠시 후 마을사람들이 와서 낯선 이 여자의 부주의에 대해 큰 소리로 가혹하게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더 많은 주민들이 몰려 나와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잉골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이 사고가 의사의 잘못이 아니고 아이의 잘못이라며 이 숙녀를 안심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한국인의 본심을 알게 됐다. 그들은 사랑스럽고 친절하며 이해심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과거가 미래에 주는 교훈

잉골드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1925년, 58세 잉골드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플로리다에 살면서 마지막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고향인 전주에 있는 집으로 자주 되돌아가곤 한다. 한없이 자비하신 주님은 그곳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세워주셨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정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잉골드가 전주에 온 지 12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는 우리들이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잉골드 일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던 한 해가 지나 생명책 한 페이지가 새롭게 열렸다. 한 해를 보내면 우리는 슬퍼진다. 한 해동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했고, 자기 연민에 빠져 선을 행할 많은 기회를 놓쳤고, 후회할 많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미래에 도움이 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고근 예수병원 홍보과장

처음 마티 잉골드가 전주에 왔을 때 그녀를 구경하러 온 여인들이 “당신은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나요?”라는 묻자, 잉골드는 “나는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을까?”를 자문했다. 이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에 우리는 스스로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을까?”라고 물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