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태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

[의학신문·일간보사] 복거일, 그는 1996년에 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라는 책 속 ‘작은 글자의 중요성’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언어들엔 있으나 우리 언어엔 없는 말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으레 아쉬워진다….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 없다는 것은 그 사물이 없거나 그것에 대한 사회적 사고가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했음을 뜻한다.”

요즘 우리 의학교육학계에 자주 회자되는 말이 있다. Academic Medicine. 오래 전부터 북미와 유럽에서 의학을 논할 때 쓰고, 우리 의학계의 선구자들도 일찍부터 써온 이 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우리에게는 없다. 적절한 번역어도 없다. '대학의학'이란 말을 쓰기도 했지만, 이 말이 갖는 근본적 의미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지난 1년 많은 의학교육 관계자들이 적절한 우리말로 바꾸려 노력했지만 아직 결론이 없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이 말이 가진 의미와 방향성에 대한 서구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고 공부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사용했던 medicine의 번역어 의학(醫學)이 academic medicine이고, medicine은 그냥 한글자로 의(醫) 또는 의과(醫科)라고 번역해야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필자는 한다.

의(醫) 또는 의과(醫科, medicine)는 의과학(醫科學, medical science), 의술(醫術, medical technology), 이료(醫療, medical care) 즉 과학에 바탕을 둔 지식과, 돌봄의 기술 그리고 따뜻한 인간적 돌봄을 묶은 보다 근본적 개념의 단어라 믿어지고, 의학(醫學, academic medicine)은 교육(education), 연구(research), 진료(practice)를 뜻하는, 의(醫)를 행함에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 의미를 갖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일부에서는 medicine을 academic medicine과 practical medicine으로 구분해 약자로 AM, PM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이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진료(practical medicine)는 academic medicine(의학)에 속해 있는 일부 개념이지 따로 떼어 낼 수 있는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academic medicine은 의과대학이나 대학병원, 그 외에 교육병원이 행하는 의료를 말하고, practical medicine은 교육과 연구가 빠진 진료에 중점을 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의사가 하는 행위는 대학에서 환자를 돌보든, 개원가에서 환자를 돌보든 누구나 근본적으로 같은 행위를 한다고 본다.

의사는 언제 어디서나 연구와 교육과 진료를 행하고 있다. 내가 무슨 연구를 하고 교육을 하느냐고 의문을 가지는 개원가 원장님도 계시리라 믿는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 연구나 교육이라는 것이 특별한 행위가 아니다. 시간 내서 칠판에 쓰고 강의하고, 현미경 들여다보고 통계를 돌리는 것만이 교육과 연구가 아니다.

의사는 누구나 환자에게 적절한 건강지침을 교육하고 있고, 자신 주변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도 교육 한다. 또한 스스로 지식 향상을 위해 연수강좌에 참석해 자기 주도적 학습을 행하고 있다. 그리고 환자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해 고민하는 행위, 어떻게 하면 부작용을 적게, 편하게 치료 받게 해줄까 하는 생각 그 자체가 연구인 것이다. 우리가 대학과 개원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해 왔던 것 그것이 아주 잘못되어 있던 것이다.

요즘 의사 평생 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있고, 윤리 의식을 높이고, 환자 안전 증진을 위해 의료계가 자율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런 것은 Academic Medicine이 갖는 기본적 개념이다. 바로 이것이 의(醫, medicine)를 실용적으로 행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의사 사회의 움직임이 모두 Academic Medicine이고, 바로 그것이 의학(醫學)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의(醫, medicine)와 의학(醫學, academic medicine)이란 말의 잘 못된 쓰임새를 교정해야 한다.

우리가 여태까지 Academic Medicine이란 말에 대한 사회적 개념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학문 도입 당시 Medicine을 ‘의학(醫學)’이라고 잘 못한 번역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해서, 특별한 생각 없이 사용한 탓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도 academic medicine이란 개념이 희박하다.

지식과 새로운 개념은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중 우리가 만든 것이 거의 없다. 그냥 지식과 개념을 만든 서구 사회의 언어를 원문으로 쓰면 그 지식과 개념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지는데 큰 장애가 있다. 우리말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또한 부적절한 번역, 외래어의 사용은 더욱 더 문제다. 지금부터라도 노력하여 적절한 말을, 적절한 개념으로, 적절하게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그것이 과학 하는 사람의 자세라 믿는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정책연구소장, 의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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