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충(Trichuris trichiura)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기생충의 하나다.

1960년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고, 회충, 구충과 함께 3대 장내 기생충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랬던 편충이 최근에는 전 국민 감염률이 1%를 넘지 않을 정도로 보기 드문 기생충이 되고 말았다. 감염률뿐만 아니라 감염량도 과거에 1인당 10~20마리씩 되던 것이 지금은 그저 한 마리 또는 두 마리 정도에 그치고 있다.

편충이 우리에게 주는 해는 극히 미미하다. 한 사람이 수백에서 수천 마리 또는 그 이상 감염되어 있을 경우에만(동남아시아에서는 이런 환자가 발견된다) 설사와 소화불량 그리고 빈혈을 초래할 수 있다. 드물게는 충수돌기염(속칭 맹장염)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보통은 대장 내에 편충 한두 마리가 있는 정도인데, 아무런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좋은 결과를 나타낼 가능성이 크다(아래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편충과 인간은 ‘공생’= 말하자면 편충과 인간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공생의 단계로까지 발전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장내시경에서 발견되는 편충 한두 마리를 굳이 제거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는 답이 나올 날이 멀지 않았다고 본다.

◇‘기생충치료법’ 시도= 염증성장증후군(inflammatory bowel disease;IBD)의 대표적인 예인 궤양성대장염(ulcerative colitis)과 크론병(Crohn’s disease)은 지속적인 복통, 설사, 출혈 등이 나타나며, 치료가 극히 어려운 난치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질환들이 요즈음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국내에도 2015년 1년 동안 크론병만 해도 1만 8천 명이 진단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IBD를 치료하기 위해 새로 등장한 요법 중에 기생충을 일부러 감염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것을 “기생충 치료법(worm therapy)”이라 부르는데 미국, 영국 등지에서 많이 시도되고 있다.

사람 편충 암컷의 모습. 가느다란 부분이 머리이고 두툼한 부분이 몸통이다. 가느다란머리 부분을 대장 점막에 매몰한 채 매달려 1년 이상 생존한다.

크론병에 대한 기생충 치료법은 돼지편충(Trichuris suis)을 주로 이용하는데 실험실에서 부화시킨 돼지편충의 충란 500~2500개를 작은 캡슐에 넣어 매2주마다 한 번 씩 총 6회(12주) 물과 함께 삼키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궤양성 대장염 및 크론병 환자를 치료한 경우 위약(placebo)을 준대조군의 증상 호전율 16%에 비해 치료군에서는 호전율이 50% 정도로 나타나 뚜렷한 치료효과를 보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미국 Iowa 대학의 Joel Weinstock 박사팀). 치료 시작부터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약 6주가 걸렸다. 이러한 결과는 다른 어떤 치료법보다도 양호한 것으로서 최근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까지 전파되어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이 치료법의 과학적 근거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IBD의 원인으로 여러 가설이 제시되고 있으나 자가면역질환(Th1-Th2 면역반응의 밸런스가 깨짐)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으며, 돼지편충이 이 자가면역 반응을 잘 조절해 주기 때문이다.

즉, IBD는 Th1 면역이 너무 강하게 나타나 생기는 질환인데 이런 환자에게 돼지편충을 인공적으로 감염시키면 Th2 면역이 유도되어 강한 Th1 면역을 상당 부분 중화시킬 수 있기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둘째, 돼지편충은 사람에게 감염을 일으키기기는 하지만 6주 정도만 기생하며 그 후에는 자연배출 되기 때문에 특별한 치료가 필요 없고 사람에게 주는 해도 거의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점 등이다.

◇IBD, 사람편충 치료 효과= 사람 편충은 돼지편충에 비해 인체 내 생존기간이 길다(1년 이상 생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됨). 따라서 Th2 면역반응을 나타내는 기간도 상당히 길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IBD 치료에 사람 편충을 사용한다면 더욱 좋은 결과를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사람 편충의 생활사를 유지하면서 충란을 확보하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만이 종숙주라서 성충을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돼지편충은 돼지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다.

현대인은 잦은 정신-신체 스트레스와 함께 Th1 면역반응이 Th2 면역반응에 비해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IBD는 물론, 피부아토피, 기관지천식, 알레르기성 관절염, 비염, 결막염 등 자가면역질환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편충 한두 마리가 감염되어 있으면 늘 약간의 Th2 반응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며, 자가면역질환은 상대적으로 억제되고 있을 것이다(치료를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수의 편충이 있어야 함). 그러니 이미 감염되어 있는 편충 몇 마리를 굳이 제거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일까?
■ 채종일 한국건강관리협회장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