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4월 멕시코와 미국 등지에서 사람과 돼지, 조류인플루엔자들의 유전물질이 뒤섞여 있는 정체불명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이것이 ‘신종인플루엔자’(이하 신종플루)다. 이 ‘신종플루’라는 용어는 필자가 출입하던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들이 회의를 거듭한 끝에 신종인플루엔자를 약칭해서 부르기로 합의한데서 탄생했다. 신종플루는 발견된 지 한 달도 안 돼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사망자가 수십 명 나왔다. 국제보건기구(WHO)는 최고단계인 6단계(대유행, pandemic) 경보를 발령했고, 감염자 수는 넉 달 만에 30만 명을 넘어섰다. ‘신종플루’나 ‘메르스’ 같은 신종 감기가 나타났을 때 전문가와 일반인은 상이한 반응을 보인다. 전문가들은 직업적 특성상 엄중하고 심각한 병들을 자주 대한다. 그들에게 ‘신종플루’란 어디까지나 감기, 다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감기일 뿐이다. ‘신종플루’ 당시도 그랬다. 그러나 일반인은 다르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언론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병균이 치명적이지 않거나 조기에 소멸되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사망자가 발생하고 그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사회는 백약이 무효한 공황 상태에 빠진다. 이때가 되면 전문가가 사태를 수습하려 안간힘을 써도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게 되기 때문이다.

전염병(감염병)은 그것이 치명적이든 아니든 초동 발생단계에서 잡아야 한다. 인류가 이룩한 과학의 성과는 자연의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는 여전히 왜소하다는 게 필자의 평소 철학이다. 신종플루가 아시아권으로 공포의 전선을 확대하려는 시점에 전재희 전 복지부장관(이하 ‘C 전 장관’) 지시로 보건복지부는 신속 정확하게 물샐 틈 없는 전략을 짰다. 질병관리본부에 전략상황실을 설치하고, 철저한 검역관리, 의심환자 동승승객에 대한 전화모니터링, 국민 자진신고 유도에 만전을 기했다. ‘C 전 장관'이 직접 나서 챙기는데 누수가 있을 수 없었다. 비행기 탑승명단과 연락처를 모두 입수해 환자 근처에 앉았던 사람을 가려내고, 모니터링 결과 발병이 의심되는 사람을 철저히 격리하는 전 과정을 'C 전 장관'이 직접 확인했다. 별도의 시설이 필요한 경우에는 장관이 서울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했다. 운도 따랐다. 전남 화순에 유치한 백신생산시설에서 백신이 때마침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백신만 충분히 공급되면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다. 그 해 5월 열린 WHO 총회의 이슈는 단연 ‘신종플루’였다. 옆 나라 일본에서만 10만명 단위의 감염자가 나왔다. WHO 비상상황실에서 한국 대표단은 ‘신종플루’에 대한 국내의 조기대응체계를 소개해 보건강국으로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망자가 나왔지만 초동대응이 주효했던 덕분으로 우리 사회는 별다른 동요 없이 ‘신종플루’를 넘을 수 있었다. 최소한 정부를 불신하는 단계로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복지부는 ‘신종플루’ 대응의 전 과정을 정리하고 요약해 질병관리본부에 넘겼다. 비슷한 상황이 닥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터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도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전문가들은 ‘신종플루’ 때처럼 ‘이거는 심각한 게 아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이유가 ‘2미터 이내에서 1시간 이상 접촉을 해야 걸릴 정도로 전염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전문가가 별 것 아니라고 하자 국민들은 마음을 놓았고, 그러자 곳곳에서 구멍이 뚫렸다. 바로 이 때문에 감염병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 행정 경험이 없었던 문형표 전 장관(이하 ‘M 전 장관’)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너무 믿은 게 실수였다. 전문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에 끌려 들어간 것이다. 원인이 불분명한 상황이 발생하면 의사결정권자는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해 일반인의 시각에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위기관리의 ABC다. 그런데 전문가에게 최종 결정을 맡겨버렸다. ‘메르스’가 ‘메르스 사태’로 이어지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신종플루’ 때 어떻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건만…

결과적으로 지난해 메르스 사태는 보건복지부 등 보건당국의 사실 은폐와 늑장 대응 탓에 악화했음이 올 1월 14일 감사원 감사 결과로 재확인됐다.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가 S병원 의사인 35번째 환자의 감염 사실을 확진 일자까지 속여 가며 늦게 공개하고, 감염 의심자 명단을 보건소에 바로 알려주지 않아 7일간이나 대응 조처를 지연시키는 등 정부 대응은 말 그대로 총체적 부실과 무능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런 감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감사원이 양병국 질병관리본부장 이하 질병관리본부 관계자 12명, 복지부 고위공무원 2명, 보건소 지방간호서기 및 지방보건주사보 등 16명의 징계를 요구하는 데 그치고,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장이었던 ‘M 전 장관’에게는 면죄부를 줬다는 사실이다. 이유도 기가 막힌다. 장관한테 보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국민 38명이 목숨을 잃은 중대 사태의 주무부처 장관이 보고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그 자체로 장관으로서 엄청난 과오가 아닌가. 우리나라 장관은 이렇게 무능하고 무책임해도 상관없는 허수아비 자리란 말인가. 감사원은 또 M 전 장관이 이미 사퇴했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연말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지금도 엄연히 공적인 지위에 있다. 희대의 방역 실패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장관이 4개월 만에 다른 공직에 나아가면서 전혀 불이익을 받지 않은 셈이다. 공직자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잠시 퇴임했다가 다른 자리로 복귀하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니 이래서야 어떻게 책임행정이 이뤄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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