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숭례문 복원에 사용되었던 소나무는 강원도 삼척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에서 벌채되었다. 조선왕조의 성지로서 특별보호를 받던 지역이었으므로 오래된 소나무가 남아 있었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지였으므로, 아무도 함부로 들어가서 나무를 벨 수 없는 조선왕조의 성역이었다.

낙산사 의상대 노송(老松), 하조대 고송(孤松), 주문진 늘 푸른숲, 소광리 대왕송(大王松), 운문사 처진 소나무, 경주 삼릉(三稜) 도래솔, 설악산 곳곳에 노송선경(老松仙境),…
모두 우리의 기상이요, 의지다. 우리의 자랑거리 국보급이다.
동해안, 금강송(金剛松), 황장목(黃腸木), 춘양목(春陽木)…
‘살아서, 1000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 굵고, 길고 튼튼하여 전통건축물을 짓는 대목장(大木匠)들이 특히 선호한다.

준경묘 가는 길은 험하다.

동해고속도로의 종점인 동해IC를 나와 삼척방면으로 내려가다가 38번 국도를 이용, 도계방면으로 가다보면 준경묘(濬慶墓)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만난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마을 입구에 들면 ‘준경묘 1.8km’ 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만난다.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급경사 지역을 산허리를 따라오르다가 가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골짜기 시멘트 포장로를 따라 비지땀을 흘리며 산복 정상지점에 이른다. 거리는 1km였다. 다시 산중복 평행선을 긋듯 비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0.8km 걸어 들어가 작은 고개를 넘어서면 축구장 2개정도 넓이의 탁 트인 분지가 열리고, 분지상단에 잘 조성된 묘지가 나타난다.

두타산(頭陀山)에서 동남향으로 뻗어 내린 노동산(蘆洞山)자리, 좌청룡우백호의 명당은 두타산의 배꼽이며 맹호출림(猛虎出林)의 형국이다. 하늘을 찌르듯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하였다. 수십m 큰 기에 쭉쭉 뻗은 천하제일 ‘미인송림(松林)’ 신기하게도 미인송은 묘지를 향해 경배하듯 비스듬히 서있어 더욱 성스러워 보인다.

환경단체 ‘생명의 숲’ 은 준경묘 소나무 숲을 2005년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숲’ 부분에서 대상으로 선정했다. 2008년 2월 방화사건으로 국보1호 숭례문이 전소되었다. 복원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준경묘역은 국가 주요 문화재 복원을 위한 벌채 1순위로 지목되었다. 준경묘·영경묘봉향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민들은 3차례 회의를 열고 벌채를 허락했다. 소나무 20그루가 2008년 12월 10일 준경묘에서 벌채되었다. “어명이요.” 문화재청장, 종약원, 봉양회 관계자들은 채벌될 소나무의 영혼을 달래는 벌채의식, 고유제, 산신제를 지내고 벌목을 하였다.

‘어명’ 반복! 임금의 명에 따라 궁궐재목으로 쓸 나무를 벨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려 나무의 영혼을 달래주려는 마음이 담겨있다. 현재 지름 60cm 넘는 궁궐재목 3000여 그루가 준경묘 근처 숲에 자라고 있다.

2001. 5. 8 준경묘역에서는 산림청, 문화재청, 보은군, 삼척시 관계자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속리산 정이품송혈통보전을 위한 혼례식’을 거행했다.

당시 산림청장 신순우(申洵雨) 집례하에 신랑목 정이품송에서 채취한 송홧가루(화분)를 신부목 준경릉소나무 암꽃에 묻히는 방합례(房合禮)가 거행되어 임업연구원은 정이품송 준경묘 혈통의 2세 소나무를 얻었다. 신부목 준경릉 소나무는 당시 95세 키 32m, 가슴둘레 214cm의 빼어난 용모를 지닌 소나무, 미인송이었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 5대조인 이양무 장군의 묘다. 준경묘를 아는가? 묘를 보지 않고는 모른다. 묘 주위를 뒤덮은 소나무숲 그 낙락장송은 얼마나 멋들어져 있는지.

조선왕조는 송금(松禁), 우금(牛禁), 주금(酒禁)의 삼금정책을 폈다. 준경묘는 조선왕조의 성지로서 보호를 받던 지역이어서 오래된 소나무가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 외진 땅에 이성계의 5대조 묘가 자리잡게 되었을까. 역사적 흥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성계의 선조들인 전주이씨들은 대대로 전주에서 살았다. 전주 이씨 시조인 신라시대 이한(李翰·이성계의 21대조)의 묘역인 조경단(肇慶壇)은 전주시 덕진동에 있다.

“해동(海東) 육용(六龍)이 날아샤 천복이시니…” 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목조(穆祖)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17대손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5대조로 본명은 이안사(李安社)다. 이안사 조부(15대) 이린은 이용부로 대장군을 지냈다. 대장군은 고려시대 무인의 최고 관직이다. 16세(世) 이린은 내시집주를 지냈으며 당시 실력자인 시중(侍中) 문주겸의 딸과 결혼했다. 시중은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최고관직이었다. 이성계의 4대조(고조부)인 이안사는 고려 후기의 전주 호족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안사는 성품이 호탕하여 사방을 경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주 관아에 소속된 관기를 좋아했다. 고려 고종 18년(1231)에 전주에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부임해 왔다. 전주의 호족들이 모여 새로운 별감 부임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벌어졌고, 이 술자리에서 이안사가 아끼던 기생의 미모와 춤솜씨를 보고 별감이 욕심을 냈다.

“ 내놔라!”
“ 어림없는 소리, 못 내놓는다!”

이 일로 전주 주관(州官)과 다투게 되었다. 이안사를 경계한 주관은 안렴사(按廉使·안찰사·지방5도의 장관)와 의논하여 중앙에 알리고 군사를 동원하여 이안사를 치려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안사는 황급히 피란해 강릉도 삼척현으로 이주했다. 이 때 그를 따르던 170호가 이안사를 따라 나섰다. 이안사가 삼척으로 피한 까닭은 부친 이양무가 삼척이씨 이강제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주를 떠난 이안사는 태산준령을 수없이 넘어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안사가 정착한 활기리는 지금도 첩첩 두메산골이다. 활기 분교 동북쪽 200m엔 목조대왕 구거유지(舊居遺址)가 있다. 옛 집터엔 지금도 섬돌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앞엔 냇물이 흐르고, 뒤편엔 산이 있는 100여평의 터로, 집 한 채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옹색한 땅이다. 활기리에 정착 1년 후 부친 이양무가 죽었다(고려고종 18년, 1231). 이안사는 아버지 묘자리를 구하러 사방을 헤매다 나무 밑에 쉬고 있었다.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이 자리에 묘를 쓰면 5대 후손이 왕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귀가 번쩍 뜨인 이안사는 스님에게 달려가 자세히 물었다. “이 자리에 말 백마리를 잡아 제물로 하고 황금으로 만든 관을 쓰면 5대 후손이 왕이 될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부유하지 못했던 이안사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꿈속에서 동자가 나타나 “들판과 장에 나가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들판에 나가보니 벼의 황금빛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무릎을 쳤다! 다음엔 장에 나가보니 흰 말을 팔러 나온 사람을 만났다. 백마(白馬)를 사가지고 볏짚으로 관을 싸 황금관에 준하여 사용하여 백마(百馬)를 백마(白馬)로 해석한 흰말을 잡아 제를 올렸다. 그렇게 하여 준경묘가 만들어졌다.

준경묘에서 3.6km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는 이양무의 부인 이씨의 묘 영경묘가 있다. 준경묘·영경묘 제실 앞에는 준경묘 1.8km, 영경묘 200m의 푯말이 있다. 영경묘는 오십천 지류 언덕바지에 있다. 입구에서 100m 오르면 사당이 있고 다시 100m 오르면 묘가 있다. 묘역엔 금강송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