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인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 정책이 사실상 폐기됐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은 38년 만에 대대적으로 손질하던 사업으로, 복지부 개선기획단이 마련한 개편안이 시행된다면 2011년 기준(추산)으로 보수 외에 연 2000만원 이상의 추가 소득(임대․이자․배당소득 등)이 있는 직장가입자 26만3000여명은 월평균 19만5000원의 건보료를 더 내야 한다. 또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등재돼 건보료를 내지 않았던 사람 가운데 연 2000만원 이상의 소득이 있는 19만3000여명은 지역가입자로 전환돼 월평균 13만원의 건보료를 추가로 내야 한다. 반면, 전체 지역가입자의 80%가량(약 600만 명)은 건보료를 더 적게 내 인하 혜택을 보게 되는 수혜자가 더 많다. 저소득 취약계층 지역가입자를 위해 마련된 최저보험료 1만6480원만 내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이 국정과제는 2012년 건강보험공단쇄신위원회가 제시한 ‘소득 중심 부과체계 단일화’ 방안으로 논의를 시작한 이래, 정부는 2013년 7월 학계와 연구기관 등 전문가들로 건강보험 개선기획단을 꾸리고, 7월25일 첫 회의부터 지난해 9월11일까지 모두 11차례의 전체회의를 통해 직장가입자의 보수 외의 소득에 건보료 부과를 확대하고, 지역가입자 건보료 산정 기준에서 성․연령․자동차 등을 제외하는 개편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김종대 전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또한, 지난해 11월 14일 퇴임식에서 “현행 건보료 부과 기준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며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의 개편을 다시 촉구했다. 특히, 김 전 이사장은 자신의 퇴임 후 건보료를 실례로 들었다. 그는 앞으로 직장가입자인 아내나 자녀의 피부양자로 전환되면서 연 2000만원의 공무원연금소득과 강남의 아파트(5억4240만원), 경북 예천의 땅(2243만원) 등 많은 재산이 있음에도 건보료를 내지 않게 된다며, 현행 피부양자 제도를 지적했다.

건강보험 개선기획단은 지난해 11차 회의 직후 곧바로 최종보고서를 내고 구체적인 개선 방향을 확정하기로 했지만 복지부는 보고서 발표를 미루며 해를 넘겼다. 올해 1월 초 최종 발표를 확정하고 복지부 출입기자단에 사전 설명까지 했지만 대통령 업무보고를 앞두고 발표 일정을 1월 29일로 재차 연기했다. 문 전 복지부장관은 27일까지만 해도 세종시 복지부 기자실에서 비공개 간담회를 통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클 수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다”며 “최근 사회적 논의가 우호적이지 않아 발표 시기를 늦추자는 것이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라며 정책 추진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문 전 장관은 올해 1월 28일 서울 마포구 건강보험공단을 찾아 “올해 중에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안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며 “건보료 개편을 연기해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년 4월 총선이 예정돼 있고 여야 국회의원들의 반대가 확실해 다시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 전 장관은 “(개편 후) 지역가입자의 건보료가 줄어드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추가소득이 있는 직장가입자나 피부양자의 부담이 늘어나면 솔직히 불만이 있을 것”이라며 향후 예상되는 비판여론을 의식해 정책 추진을 포기했음을 시사했다.

현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안의 ‘백지화’ 배경에는 고소득 가입자의 반발이 자리한다. 정부의 예고대로 건보료 부과체계가 소득에 따라 개편된다면 고소득자는 건보료가 오르고, 저소득자는 적게 내는 합리적인 대안이 제시됐을 것으로 보여 논란이 거세질 전망이다. 복지부는 건보료 인상으로 불만을 표출할 고소득층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간 논의된 건보료 개편 방향대로 부과체계가 바뀌면 고소득 직장가입자와 피부양자 등 45만여 명이 건보료를 더 내야 한다. 하지만 6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일반 가입자들은 오히려 건보료를 더 적게 내게 된다. 복지부는 그간 논의에 활용된 자료가 2011년에 작성된 것이어서 추가 시뮬레이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도 연기 이유로 들었으나 이미 여러 차례 확정을 예고했던 만큼 그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혜택을 보는 상당수보다 아닌 쪽의 아우성이 분명 더 크게 들릴 것이란 점이 두려워 정부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것이란 지적이 일고 있다. 고생하고 비용 들여 추진하던 정책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부자증세’ 논의가 필요한 것이지, 증세 논란이 두려워 정부 스스로 합리적 정책을 포기할 일이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지금이라도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기획단이 마련한 개선안을 발표하고 예정대로 추진하는 것이 마땅하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는 지역가입자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고 고소득 직장가입자에게 유리한 역진적 제도”라며 “돌연한 개편 논의 백지화는 황당한 정책 후퇴이며 정치적 셈법에만 치우진 결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왜곡된 현상을 바로잡겠다던 호기(豪氣)는 결국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이 요동하게 하더니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었다는 뜻으로, 예고만 떠들썩하고 실제의 그 결과는 보잘 것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 되고 말았다. 정말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해 정책을 만드는지 정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중단된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 과제는 정진엽 신임 보건복지부장관이 넘어야 할 ‘큰 산’으로 작용하게 됐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