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은 서울 도심에 남은 사실상 마지막 사대문이다. 돈의문(서대문)은 일제강압기에 헐렸고, 숭례문(남대문)은 허망하게 사라졌다가 최근 복원됐다. 숙정문(북대문)이 있지만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항상 닫아놓아 문 구실을 못하는데다 그나마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대문은 이제 동대문뿐이다.

동대문은 1396년(조선 태조5년)에 건립된 뒤 1453년(단종1년)에 중수됐고, 1869년(고종6년)에 개축했다. 동대문 인근에는 조선시대로부터 출발해 근대 전차와 운동장, 시장의 흔적, 최신식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까지 600년 역사가 함께 겹쳐 있다.

흥인지문의 운명은 기구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뚫고 한양으로 입성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난 뒤 이 문을 열고 눈물을 흘리며 환궁했다.

“나는 돌로 만든 문임으로 소위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는 것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니 철석인들 아니 녹고는 못견디겠더이다.” (1928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 ‘동대문 팔자타령’)

1899년 전차가 개통되면서 조선 수도의 관문이었던 흥인지문은 전차역으로 전락한다. 일제강점기엔 전차를 복선화한다고 아예 흥인지문 좌우 성벽을 헐어버렸다. 서대문처럼 철거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살아남은 이유 또한 기구하다. ‘옛 조선 정벌 당시 한양으로 진격한 승전의 상징이니 남겨두자’ 는 게 일제의 논리였다.

동대문은 외적의 침입, 일제강점기, 6·25 전란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켰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옛 사람들은 흥인지문을 ‘동대문(動大門)’ 이라고도 불렀다. 몸을 움직여 나라의 격변을 예언하는 문이라는 의미였다.

조선 광해군 말년에는 동대문 문루가 북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변고의 징조라며 쑥덕거렸는데 과연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군은 홍제동에서 기병해 세검정을 거쳐 북서문인 창의문을 통해 들어왔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문루가 동남쪽으로 기울어졌다. 난리 당시 명성황후가 동대문을 빠져나가 장호원에 피신했는데 장호원은 동대문의 동남쪽 방향이다.

동대문이 움직인다는 것은 단지 속설만은 아니었다. 1983~1986년 학자들이 조사해 봤더니 해마다 10월이면 동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해 이듬에 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문루를 지을 때 수축·팽창률이 다른 목재를 섞어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흥인지문은 고요한 중세도시 한양을 기억해야 된다. 오늘날 동대문을 떠올리면 흥인지문보다는 청계천 주변 시장이나 DDP, 패션타운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흥인지문 구간은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6·7번 출구에서 출발해 흥인지문~오간수문허~이간수문~동대문역사관~광희문~천주교 신당동교회~장충체육관 등의 코스를 밟아 관광이 진행된다. 이 역사관광구간은 1.8km쯤 된다. 한시간 정도의 여정이다.

한양도성 스토리텔링북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를 보면 한양도성에 관한 이야기는 100가지를 만날 수 있다. 사대문(四大門)의 대표는 국보 1호 숭례문이다. 최근 보물1호인 흥인지문이 뜨고 있다. 이제 학계와 서울시 등에서는 한양도성 관련 연구에 있어서는 도성 전체의 군사, 역사를 넘어서 각 성문들의 학술, 조형, 문화적 가치에 더 주목하여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대문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를 갖춘 흥인지문(동대문)의 연구가 더 활발하다.

동대문은 성문 보호를 위해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벽을 더 둘러싼 옹성(甕城)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동대문이 들어선 서울 종로구 종로6가 일대는 도성일대 보다 지세(地勢)가 가장 낮은 편이어서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문의 이름에도 ‘지(之)’ 를 넣어 보완했다고 한다.

조형적으로 가장 웅장한 문은 역시 숭례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었다. 숭례문은 왕이 국가 대소사 때마다 출입한 정문이었다. 단청과 장식이 매우 훌륭하다. 500년 이상 버티다 1915년 전차복선화공사로 헐어버린 돈의문(서문), 문을 열면 도성 풍속이 음란해진다는 이유로 내내 닫혀있던 숙정문(북문)도 사연이 많다.

최근 학계에서도 한양도성 성곽과 사대문의 군사적, 방어적 의미를 강조하지 않고 있는 실정으로 보인다. 성곽은 영역을 확정짓고 기본적 통제를 위한 수단이어서 성곽시설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도 있어 보인다.

보물 제1호 흥인지문은 일제 강점기 ‘동대문’ 이란 이름으로 문화재에 올랐다.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이 한창이던 1996년 본래 이름을 찾았다. 문 이름은 바뀌었어도 동네 이름은 여전히 동대문이다. 일몰 후 자동으로 조명이 들어오는데 여름엔 오후 8시는 돼야 불이 켜진다.

동대문 일대는 해가 져야 본색을 드러낸다. 밤이 되면 잠을 잊은 올빼미족과 상인들이 쇼핑타운 일대로 모여들어 불야성을 이룬다. 동대문은 쇼핑천국이다. 그러나 복잡하고 까다로운 천국이다. 상권을 알아야 천국을 누릴 수 있다.

동대문은 경계 너머에 있는 지역이다. 우리가 ‘동대문’ 이라 부르는 공간은 서울시 동대문구 밖에 있기 때문이다. 도로 하나를 경계로 흥인지문(동대문)은 종로구, 밀리오레·평화시장 등 패션타운은 중구에 속한다. 동대문에 가려면 주소가 필요 없다. 대신 역사와 문화의 틀을 통과해야 한다. 흥인지문 건너편 대형 쇼핑몰 장벽을 지나면 동대문이다. 청계천 산책길,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1905년 동대문시장 전신 광장시장 개설, 25년 동대문운동장 준공, 62년 피난민 중심으로 평화시장 건립, 70년 평화시장 봉제노동자 전태일(1948~70) 분신, 90년대 중후반 거평프레야·밀리오레 등 대형쇼핑몰 등장, 2007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준공.

동대문은 한국 현대사의 극적 현장이다. 동대문에선 낮과 밤의 경계도 무의미하다. 밤이 무르익어야 동대문은 동대문다워진다.

한여름밤 동대문 100배 즐기기, 짜릿하게 심야쇼핑 피서를 즐기라며, 동대문 시장을 정리해보자. ‘헌책방 거리’ “70~80년대만 해도 청계천에 헌책방이 100개가 넘었지. 지금은 책도둑이라는 말도 없어졌지만…” 동대문 상인은 시대의 기억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며 소회를 말하고 있다.

‘ 쇼핑몰 야외무대’는‘동대문 무대’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메가박스 동대문 심야영화 그리고 ‘클라이브’ 에서의 케이팝 공연장, 홀로그램 영상으로 싸이·빅뱅·2NE1의 라이브 무대는 실물 크기로 재현한다. 청소년 천국이다.

다음 <골목이 있는 서울, 문화가 있는 서울>의 저자 이동미씨의 ‘동대문 먹자골목’ 에서 참을 수 없는 세 가지 맛의 유혹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달나라에 간 닐 암스트롱의 끼니는 알약이었다. 역사적으로는 대단한 족적을 남겼겠으나, 참으로 불행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갖가지 채소와 과일, 요리에서 느낄 수 있는 향과 맛 그리고 씹는 즐거움이 오죽이나 간절했을까. 생선 굽는 냄새, 닭 그리고 곱창 굽는 냄새라. 저자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는 결혼이 아니고 먹는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고 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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