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우리사회는 무법천지에 가까웠다. 좌우 대립과 충돌은 도를 넘었다. 송진우·김구 선생이 암살당하는 등 사회혼란이 진정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 권이혁 전 보사부장관
대한협동당 사건이 발각되자 필자는 경기중 동기생 김한일(金漢日) 형의 친형인 김소동(金蘇東) 선생의 도움으로 평남 사인장(舍人場)이라는 곳에 소재한 목탄장에서 일했다. 김한일 형과 필자는 각별한 사이였으며, 김 형이 백형인 김소동 선생댁(서대문 천연동)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가끔 김형을 방문했을 때 김소동 선생 내외분을 뵐 기회가 많았다.

김소동 선생은 경북 상주 대지주 출신이었다. 경성제일교보(현 경기고) 제27회 졸업생으로 필자에게는 10년 선배이다. 일본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영화감독이 되어 영화사업을 시작했는데 별로 빛을 못보게 되어 영화계를 떠나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에 이바지했다. 동생 김한일 형도 영화감독이 되어 활약했지만 요절했다. 두 분은 ‘영화감독 형제’로 유명했다. 내가 협동당 사건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평남 용강군 사인장(舍人場) 산중에 있는 목탄장에서 일하게 해주었다. 나의 일은 식량배급을 위해 탄공의 성명을 기재하고 신청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목탄장은 사인장 역에서 동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산속이었는데 라디오도 없고 세상소식을 들을 길이 없는 곳이었다.

필자는 8·15 해방을 모르고 있었다. 배급양곡을 타기 위해 사인장으로 갔던 탄부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평화’가 왔다며 모든 사무가 단절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곧 사인장으로 달려갔다. 라디오가 있는 가게에 들어가 라디오를 들었다. 마침 안재홍 선생이 “금수강산에 봄이 왔다”면서 해방 소식을 말씀하고 계셨다. 나는 곧바로 사인장으로 돌아갔다. 왕복에는 최소한 5시간은 걸렸다. 밤늦게 돌아가서 탄부들을 모이게 하고 소식을 전했다. 탄부들은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으며, 나에게는 정이 들었으니 함께 살자고 간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설명하고 다음날 새벽 떠나겠다고 하면서 이별인사를 했다.

8월 16일 아침 10시쯤에 사인장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 시간이 잡혀있는 것도 아니고 기차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2시가 넘어서 태극기를 앞에 단 기관차가 오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감동스러운 장면이었다.

어디에서 출발한 기차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만포선(滿浦線) 하나뿐인 곳이니 만포진(滿浦鎭)에서 출발 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기차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장이나 안내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객실에 올라타고 기차가 떠나기만 기다리는 것이다. 기차는 경성(京城, 서울)으로 가는 듯 했는데 시간이나 행방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애국가’가 실린 쪽지가 돌고 승객들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애국가’는 되풀이됐고 기차는 가다 서다한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 도착한 것은 8월 17일 아침 10시경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울에 도착하자 곧바로 서울대병원 시계탑 건물로 향했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된 것이 미생물 구도 마사시로(工藤正四郞) 교수였다. 44년 12월 27일 학년말 때 미생물학 시험 감독을 담당했던 교수에게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해서 시험장인 제3강의실을 빠져나와 명동의 영화극장 명치좌(明治座)에 가서 프랑스 영화 ‘창살없는 감옥’을 3차례 반을 관람했다.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었다. 밤이 되자 신당동 자택으로 김소동 선생을 방문했던 것이다. 김 선생은 밤 10시쯤 귀가하셨다. 그동안 사모님이 주시는 저녁을 먹은 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김 선생은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렇게 약해 빠진 사람이 무슨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느냐”며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꼼작 말고 다음날 저녁까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다.

다음날 저녁에 김 선생이 댁으로 돌아오시더니 기차표를 한 장 주시면서 이 기차 편으로 평양근처에 있는 ‘사인장’이라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9시반쯤 경성역으로 갔다. 사인장에서 차순욱(車淳郁) 씨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다. 경성역에서 김 선생과 작별하고 나는 만포선 기차에 올랐다. 다음날 아침에 ‘사인장’에 도착했다. 차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필자를 산속으로 데리고 갔다. 30리에서 50리쯤 되는 거리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선생은 이곳에서 ‘서선조림(西鮮造林)’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계셨다고 한다. 산속에서의 8개월 동안은 무료하지 않았다. 문맹인 탄부들은 필자를 지극히 위해줬다. 그들은 필자를 징용을 피해온 사람으로 생각했으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김선생 형제가 필자에게는 은인이었는데 이분들에게 은혜를 갚아 드리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다.

해방직후의 우리사회는 무법천지에 가까웠다. 좌우의 대립과 충돌은 도를 넘었다. 송진우(宋鎭禹)선생과 김구(金九)선생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사회혼란이 진정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해방직후에 겪었던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웃으면서 넘길 세 가지에 관해서 적어본다. 하나는 이승만 박사가 비행기로 여의도공항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여의도 공항으로 몰려갔던 이야기다. 필자도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여의도로 갔다. 네 시간 정도 기다렸는데 이승만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문의 원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우리들은 들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김일성 장군이 기차로 경성역에 온다는 소문이었다. 이 김일성 장군은 진짜 김일성 장군이며, 필자의 중학교 시절에 이미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북한에서 말하고 있는 김일성은 진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차용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해방 전 평안남도 사인장 목탄장으로 가도록 도와 준 김소동 선생께서, 그쪽으로 가는 기차표를 주시면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이 사람아, 자네같이 소심한 사람이 어떻게 독립운동을 해, 김일성 장군께서는 대낮에 경성에 오셔서 진찰을 받고 가신 일도 있어.”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적어본다. 어느 날 우리 대학동기생 네댓 명이 안국동 근처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마시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마침 미군병사 서너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지 오래된 정두영(鄭斗永) 형이 지나가던 미군병사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흑인 병사한 사람이 다가와서 “왜 불렀느냐”며 “자기는 ‘유엔니그로’이지 ‘아프리칸 니그로’가 아니다”라면서 묻지도 않은 자기 신상 얘기를 했다. 정형은 “고맙다”고 하면서 악수를 했다. 사라져가는 미군 병사들에게 “굿바이”라고 한 정형이 “깜둥이도 영어를 할 줄 아네” 하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들은 미군의 일부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상식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무식해서 영어를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던 흑인이 유창한 영어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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