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김종영이 서예에 정진한 이유

‘법고창신(法古創新)’하여 마침내 ‘유희삼매(遊戱三昧)’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앞서 김종영이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수준 높은 문사(文士)교육을 받았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일제식민지라는 당시 시대적 상황은 서예에 대해 어떤 사회적 유용성도 없는 단순한 오락 내지는 취미활동으로 생각하여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조각가 김종영이 일생동안 서예에 정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함을 더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그가 서예에 정진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종영이 가장 존경하였던 추사 김정희의 시서화, 즉 예술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법고창신(法古創新)’하여 마침내 ‘유희삼매(遊戱三昧)’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법고창신은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희삼매는 어떤 경지를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淸)대 서예가인 석암(石庵) 유용(劉墉, 1719-1804)의 글씨에 대한 추사의 평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추사, 법고창신→유희삼매 도달

“그 글씨가 … 속세를 벗어나 옛 서예가들의 서법(書法)을 섭렵하고 마침내 서법의 규율로부터 벗어났으니, 나이가 들었을 때의 묘경(妙境)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신통하고 묘하다. … 글자의 크기가 작은 아이들의 손바닥만 하며, 또 어린아이의 먹물 장난과도 같으나, 모두 다 필묵의 좁은 길을 벗어나 선녀가 만든 옷(天衣)이 꿰맨 흔적이 없고 옥황상제의 보배로운 구슬로 서로 비추는 것 같으니, 사람의 힘으로 가늠할 바 아니다.”

이 짧은 평을 통해 추사가 석암을 극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기괴하게도 보이는 추사체가 어떤 연유에서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며 나오게 되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추사체는 법고창신의 결과물이며, 유희정신의 실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추사가 추구한 유희삼매의 경지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여유롭게 즐기는 취미생활로서의 자유를 넘어, 입신(入神)의 경지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창작이었으며, 또 그 너머에 어린아이와 같은 인간의 천진성이 드러나는 즐거움의 세계를 상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추사가 말한 ‘유희삼매’는 예술에 있어 유불선(儒佛仙)이 통합된 최고의 경지이며, 최종 목표는 ‘자유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종영이 추사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음은 생전에 그가 남긴 글과 여담을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가 김종영도 “유희삼매”라는 제목으로 아주 짧은 글을 남겼다.

김종영, 추사를 스승으로 삼아

“유희란 것이 아무 목적 없이 순수한 즐거움과 무엇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 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된다고 보겠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헛된 노력’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는 예술의 진전을 볼 수 없다. 그리스 조각에 유희성이 없는 것은, 그리스 조각가는 공리가 없는 데는 노력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 작가 김종영이 추구한 예술세계가 어떤 것인지 함축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예술의 근본은 순수한 즐거움과 자유의 추구이며, 세속적인 관점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헛된 노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김종영은 자신의 서예작품에 자신의 이름과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츰 이름과 호 대신에 조각하는 사람인 ‘각인(刻人)’을 거쳐 조각하는 도사 ‘각도인(刻道人)’으로, 그리고 말년에는 역설적으로 조각하지 않는 도사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 쓰고 낙관을 찍었다. 이를 통해 김종영이 서예에 정진한 이유가 탈속한 도인의 경지에서 자유를 누리고자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탈속한 경지에서 자유를 누림

이런 이유에서인지 김종영 서체의 특징은 ‘특징 없는 것이 특징’인 것이다. 어떤 규범이나 전례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이 희작(戱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사표로 삼은 추사선생을 통해 ‘법고창신’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서예에 정진한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조각가인 김종영이 고대 그리스 조각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스 조각이 서양조각의 규범으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희성이 없어 입신의 경지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움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추사의 유희삼매에서 비롯된 것이며, 김종영 세대의 한국조각가들이 일본인 선생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실적 인체 조각에 몰두할 때 김종영이 그와 같은 조각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종영은 ‘유희정신’ 이라는 글에서 20세기 서구의 젊은 전위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 대하여 “기성관념에 도전하는 그들의 용기, 일체의 불순을 거부하는 자유, 방자무인(榜者無人)할 정도로 그들의 행동은 자신과 용기에 넘친다”고 하며, 추사선생도 예외는 아니라고 하였다. 서구전위미술에 대한 김종영의 이와 같은 인식이 인체조각에서 추상조각에 전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체조각에서 추상조각으로 의 전환은 김종영에게 필연적인 귀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추사를 사표로 삼을 만큼 서예에 깊은 조예를 가진 김종영이 서양미술 특히 조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외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에는 김종영이 어떻게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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