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우성 김종영(1915∼1982) 선생이 추구한 아름다움은‘불각(不刻)의 미’로 압축된다. 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억지로 군더더기를 붙이려 하지 않았다. 김종영 선생은 추상을 넘나들며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 한 300여점의 조각작품과 3000점의 드로잉 그리고 1000여점의 서예작품을 남겼다. 이에 본 컨텐츠는 김종영미술관의 도움으로 김종영선생의 생애와 글 그리고 그의 작품을 통합적으로 소개하고자 기획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을 만나다!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우성 김종영’ 연재를 시작하며…

우성 김종영(1915~1982)
지난 세기 한국미술계의 장르별 대표 작가를 꼽으면 회화에서는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을 꼽을 수 있으며, 조각에서는 단연코 김종영을 꼽을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고 이경성은 김종영을 “양괴(量塊)에서 생명을 찾는 미의 수도자”라 하였다. 그가 남긴 조각, 드로잉, 서예 그리고 글들을 살펴보면 20세기 한국미술계에서 김종영은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같은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다.

김종영은 경상남도 창원군 소답리에 있는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 대궐집”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 15살까지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영남의 전형적인 사대부집안인 김해 김씨 22대 손인 부친 성재(誠齎) 김기호는 시, 글씨, 그림에 능통한 선비였다. 그래서 부친은 많은 문인, 서예가, 화가들과 교류했다. 김종영은 이런 집안 분위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서예를 접하게 되었다. 이런 여건이 훗날 김종영이 조각가가 되는 동기가 되었다.

경남 창원서 유년시절 보내

부친 김기호는 전형적인 선비임에도 라디오와 독서를 통해 서양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이런 부친의 학문적 태도는 김종영이 조각 공부를 위해 일본유학을 하는 동안 일본인 지도교수들의 영향보다는 자신이 관심 있는 서양 조각가들의 화집(畵集)을 보고 릴케 등의 문학작품을 읽으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형성해나가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김종영의 호 우성(又誠)의 의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종영은 귀국 후 1941년 12월 결혼 후 고향 창원에서 구장이라 하여 지금으로 치면 시골 이장과 같은 일을 하였다. 그는 동네 농민들에게 고등채소를 심도록 권장하였고, 스스로 농사일을 즐겼다. 그 예로 그는 당시 일본에서 단감나무를 가져와 생가에 심기도 하였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듬해 인 1946년 휘문고보시절 은사였던 우석(雨石) 장발의 주도하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가 설립되었다. 1948년 당시 서울대 미술학부 학장이었던 장발은 제자 김종영에게 올라오라 기별하여 그 해부터 김종영은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조소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으며, 1980년 정년퇴임하기까지 32년간 후학을 지도하였다.

서울대서 32년간 후학 양성

6·25전쟁 중 부산 송도임시교사시절은 작가 김종영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김종영은 한국인 최초로 1953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라는 주제의 국제공모전에서 수상하였다. 김종영은 런던에서 일본을 거쳐 부산 송도임시교사로 배달 된 당시 전시 도록(圖錄)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현재 미술관에 유품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는 그 도록을 통해 당시 세계조각의 흐름을 확인 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 공모전이 오랜 시간 김종영이 품고 있던 전통조각에서 비롯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종영, 자각상, 17x16x26cm, 나무, 1964
훗날 김종영은 예술이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감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로 인체로 한정되어 있는 전통조각에 회의를 느껴 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추상예술을 접하며 그동안 작업하는 데 가졌던 여러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추상행위는 인간 본래의 욕구에 근거를 둔 하나의 정신적 현실”이라고 김종영은 자신의 노트에 적어 놨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이 인체에서 추상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영은 생전에 약 300점의 조각 작품과 3000여 점의 드로잉 그리고 1000여 점의 서예작품을 남겼다. 더불어 많은 글을 남겼다. 그 중 일부가 사후 제자들에 의해 편집 출간된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 실렸다. 망실된 작품들을 모두 포함하면 그는 일생동안 쉬는 시간 없이 부지런히 작업과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생 조각과 글쓰기에 매진

특히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어느 미술가도 김종영 만큼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그는 “예술의 목표는 통찰” 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통찰을 위해서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고, 가능한 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김종영은 일생을 은일(隱逸)한 삶속에서 시대를 통찰하여 초월적인 미술을 추구하였던 작가이자 교육자였다.

김종영은 추사(秋史)선생을 존경했고, 서양의 세잔느를 추사선생과 같은 반열로 평가하였다. 추사와 세잔느의 공통점은 ‘이전 것을 집대성하고 소화하여 거기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해방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전 것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로부터 혹평을 듣는 것도 감수하였다. 혹평을 극복하고 해방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했다. 이는 자유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필연적인 대가다. 김종영이 그들을 동서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존경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김종영이 작가로서 추구하는 삶의 표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김종영의 통찰을 통해 그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동서미술을 비교하여 20세기 한국미술이 나아갈 길에 대해 직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종영은 내면생활의 자유를 위해서는 홀로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실천하였기에 그의 예술세계는 세상에 별반 알려지지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김종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돌아보는 것이 혼란스러운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새로운 지표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는 어떤 커다란 나무였을까?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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