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눈이 많이올까…
일기예보 믿고 과감한 기차여행, 다섯시간 뒤 영동지역은 완전 설국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가득

영동 지역에 주말 내내 폭설이 내릴 것이란 예보를 듣고, 올겨울 마지막 눈구경이나 해보자는 심산으로 청량리역에서 무궁화열차를 타고 강릉으로 떠났다. 서울을 떠나 양평까지 와도 하늘을 보면 해가 쨍쨍 내리 쬐며, 봄날이 따로 없어 보이더니 원주쯤오니 약간씩 검은 구름이 보인다.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걸리는 시간은 5시간 15분, 고속버스 타면 두시간 반이면 충분한 것을 미쳤다 싶기도 하지만, 강과 산과 바닷가를 기차를 타고 달려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무작정 타고 보니, 역마다 정차하는 무궁화열차의 특성을 감안하지 못한 실수를 범했다. 기차가 원주를 지나 제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점점 터널이 자주 나오고, 그 길이도 점차 길어진다. 이제 하늘은 거의 잿빛, 네이버에 들어가 날씨 예보를 보니 제천은 비가 오는 모양이다. 이런 추세라면 동해쪽에는 기대한대로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계곡이 보이고 얼지 않은 맑은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산속 마을 풍경이 자주 나타난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봄 준비를 했는지 검은 비닐이 씌워진 밭들도 가끔씩 눈에 띈다. 이런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난 몇해 손바닥만한 밭에 작물을 심어보니 농사일보다는 응급실 당직이 더 쉬워 보인다. 이제는 기차의 정차 간격도 점차 길어지고 하늘도 점차로 더 흐려진다. 창밖으로 얼핏 중앙고속도로가 스치더니 무수히 시멘트 화물차가 보이고, 기차가 점차 속도를 줄여 제천역에 도착했다. 제천도 예보와는 다르게 구름만 짙게 깔려 있지 비도 눈도 내리지않고 있다. 다시 예보를 찾아보니 강수확률 20%, 거의 눈비가 안 올 것 같다는 이야기인데…. 아 이거 헛다리짚은 것은 아닌가 싶다. 제천을 지나 긴긴 터널 두세 개를 지나니 커다란 시멘트 공장이 보이는 동네에서 잠시 멈추는데 역이름이 쌍용이다. 주변에는 산더미 같은 석회석들이 쌓여있는 쌍용양회의 마을로 보인다. 오늘 인터넷뉴스 헤드라인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승소던데….

산이 점차 높아지는 느낌이 오더니 길에 서있는 이정표가 영월 14㎞라고 되어있다. 오른쪽으로 높은 산을 끼고 돌아서니 제법 넓은 강이 흐르고 아직도 군데군데 얼음의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동강인가 하고 생각하는 중에 기차는 영월역에 멈추어 선다.

영월역은 운치있게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기차는 점차 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는데 눈이 내리기는커녕 해가 쨍하니 내리쬔다. 그래도 이곳 그늘진 계곡에는 얼음이 전혀 녹지 않아 봄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기차가 점점 높은 곳으로 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어느새 정선을 넘어서고 있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지루하지는 않고 창밖으로 오랜만에 보는 산골의 풍경이 정겹다. 예미라 부르는 조그마한 역에 들어서는데, 역 앞의 마을이 20여채도 안되어 보인다. 여기서부터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한다. 역앞에 있는 유일한 음식점 이름이‘장금이 소머리국밥집’이다. 처음 들어보는 마을 이름인데 무엇으로 먹고 사는 마을인지 궁금해진다.

예미를 지나자 기차는 발아래로 마을을 두고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오르고 눈발도 점차 더 거세지면서 먼 산이 뽀얘지기 시작한다. 승객들이 내리는 눈을 보며 조금씩 술렁거린다. 차안의 온도가 약간 썰렁해지고 꼭대기에 눈 덮인 산들이 나타났다가는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숨막힐 듯 긴긴 터널을 지나던 기차가 속도마저 조금씩 늦추더니 답답해질 무렵 다시 나온 고지의 마을에는 펑펑 눈이 내린다. 자미원이란 간이역이 차창을 스친다. 기차도 힘이 드는지 속도를 늦추다 차창 양옆으로 곧 바로 선 산을 몇개 지나니 다시 속도를 낸다. 터널을 지나면 또 터널, 지나면 또 터널, 십여개 이상의 터널을 지나며 창 밖의 풍경도 변하는데 시야는 점차 좁아진다. 내리막길로 들어서는지 기차가 속도를 조금 내는 듯 하더니 곧 민둥산역에 정차한다. 이곳은 눈이 꽤 많이 뿌리기는 하지만 아직 쌓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함박눈이 내린다. 기차가 동쪽으로 갈수록 눈은 더 내리고 있고, 사북을 지날 무렵에는 눈발이 굵어졌다. 고한으로 향하는 길에는 새로 내린 눈이 제법 쌓여 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온통 흰 눈의 세상, 승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추전역을 지나니 시야는 흰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설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옛날에 읽었던 일본 소설 ‘설국’이 생각난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였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보고 싶었던 흰 눈의 세상이다.

눈 속에 갇혀 버린 듯한 태백을 지나 기차는 더욱더 눈발이 거세지는 산맥을 넘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신이 나서 눈싸움을 하고, 어른들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부지런히 쓸어대고 있다. 아직도 차들이 많이 다니는 고갯길은 그런대로 차량통행이 막히지는 않아 보인다. 기차는 또 하나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내심 오늘 지나는 터널 중 가장 긴 것이 아닐까 싶은데 벌써 7~8분은 지난 것 같다. 오늘 몇 개의 긴 터널을 지나서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길다는 느낌이 들면서 다시금 갑갑증이 든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의 표정을 보니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나만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인지….

이렇게 갑갑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긴 터널을 지나면 얼마나 아름다운 설경이 나올까하는 생각으로 바꾸려하는데 방송이 나온다‘. 본 열차는 마주 오는 열차를 비켜가기 위해 솔안터널 내에서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안전하게 열차 내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이거 뭐냐, 기차가 터널 안에 섰다. 또 방송이 나온다 좀 더 대기한다고, 오른쪽으로 화물열차 한대가 천천히 비껴 지나가고야 우리 열차가 다시 속도를 낸다. 아직도 멀었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밖을 내다봐도 외부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 본다. 이제 앞에 나타날 아름다운 눈세상을…. 전화기로 문자가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입구가 멀지 않았나보다. 무슨 문자인가 했더니 밴드 알림이다. 정말 열심히들 밴드질을 해댄다. 터널의 길이가 16.2㎞나 되고, 굴속에서 한번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터널이란다.

긴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도계역이다. 태백은 이곳에 비하면 눈이 온 것도 아니다. 가지에 눈이 쌓인 나무들이 아래로 축축 처져 있고 길도 모두 흰 눈에 덮여 차도 겨우겨우 움직인다. 갑자기 돌아갈 길이 걱정 된다. 기차가 눈 때문에 운행이 안 된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지만 은근 걱정이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눈의 세상, 사진으로만 보던 아름다운 풍경, 오늘은 이 풍경을 사진으로는 남기지 말고 무딘 솜씨지만 글로만 써서 간직하고 싶다. 천지가 눈으로 덮인 겨울 한복판을 기차는 거침없이 뚫고 지난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이제는 나무에 쌓였던 눈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바다 쪽을 향해 내려갈수록 습기를 잔뜩 품은 눈송이가 더 무겁게 쏟아지고 있다. 동해시에 들어서니 날이 따뜻해서 눈 대신 진눈깨비가 오더니, 정동진 가까이 오니 다시 아름다운 눈 세상이다. 정동진 앞 바다의 높은 파도는 오늘밤 이 지역에 많은 눈을 예보하는 듯하다. 이제 슬슬 바다에 저녁이 내리고 강릉역이 가까워진다. 강릉역에 내리면 저녁 먹고 바로 서울행 기차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일정, 그래도 오늘 여행은 좋다.

<정지태 고대안암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의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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