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로 일구어낸 넘버원 소화제

활명수 본격 성장기

임금이 쓰던 궁중 비방이라는 신화와 함께 탄생한 활명수는 일본강점기를 거치며 독립운동 자금을 대던 ‘보국’ 정신의 소화제로 큰 사랑을 받으며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동화는 일제 치하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비밀리에 서울 연통부(聯通府)를 현 동화약품 순화동 본사에 설치하고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으로 독립자금을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서울 연통부는 1919년 7월에 상해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가 비밀연락행정을 위한 첫 조치로서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는 기관으로 서울 동화약품 본사에 설치한 비밀 행정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던 민강 사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세가 급격히 악화되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위기의 동화약방을 인수한 것이 당시 장안에 민족 기업인으로 유명하던 보당(保堂) 윤창식(1890~1963) 선생이었다. 1937년 동화약방을 인수한 윤 사장은 회사를 현대적인 대량생산체제로 바꾸고 전문경영인 제도 도입과 사규를 제정 하는 등 경영근대화를 이룩했으며, 해외 진출과 여성 임원 발탁 등 파격적인 행보를 해나갔다. 또한 만주국에 흩어져 사는 우리 동포를 위해 1937년 ‘부채표 활명수’를 만주국에서 특허 출원했다. 1930년대에 우리나라 브랜드가 해외에 진출해 상표를 등록한 앞선 행보를 보여준 것이다.

윤창식 사장의 이러한 경영 전략으로 활명수는 동화약품의 성장과 함께 본격적인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라는 윤 사장의 경영철학은 후대 경영자들에게도 이어져 현재까지 동화약품 경영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국민 소화제’로 불릴 만큼 인기를 끈 활명수 역사의 이면에는 유사 상품과의 끊임없는 전쟁도 있었다. 1910년대에 활명회생수, 생명수 등 무려 60여 종의 유사제품들이 앞다투어 시장에 나오자 동화약품은 1919년, 유사 상표를 막기 위해 방어상표를 사용하는 시대를 앞선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그럼에도 90년대까지 유사품이 끊이질 않자 동화약품은 ‘부채표’라는 브랜드 마크와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통해 오리지널 제품으로의 자부심을 공고히 했다. 이후로도 ‘116년 된 소화제’ ‘구한말 왕들이 마시던 소화제’ ‘독립운동 자금을 대던 소화제’ 등 다른 회사나 브랜드가 흉내 낼 수 없는 활명수만의 특징을 전략적으로 부각하며 그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현재까지 활명수는 116년 동안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소화제 시장에서 굳건한 1위를 지키고 있다. 활명수의 지속 성장에는 ‘최장수 의약품’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뒷받침으로 활명수는 1897년 출시된 이후 지금까지 성장세를 기록하는 장수 제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동화약품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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