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민 손에 무엇을 쥐어 주었나

이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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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기 없는 얼굴에 깃드는 검은 그림자
차가운 입술이 파래져 간다
안개 낀 눈동자가 뒷걸음을 친다

지극히 고요한 날을 골라
말없이 가리라던 소망
오늘이 그날이리라

가느다란 임종의 물결에 실려
내밀던 손이 힘을 잃고 떨어진다
숨소린 그치고 산소마스크 소리뿐

그가 내민 손에
나는 무엇을 쥐어 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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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로: 서울의대 졸업. 순환기내과. 인제대 총장.

등단 월간문학(1989).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독일의 실존철학자)는 ‘인간은 죽음에 붙여진 존재’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How we die’를 쓴 예일대학 의과대학 누랜드(Sherwin Nuland) 교수의 ‘죽음은 생의 첫 출발과 함께 시작된다’와 같다. 살아간다(living)는 죽어간다(dying)와 서로 필요충분조건의 동치(同値)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는 너무 허무에 치우친 수사다. 해 봤자 텅 빈 덧없음뿐이라는 허무보다는 앞에 이른 철학자나 교수의 의견에 충실하게 맞추어 해석하고 쓰이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것일진대. 아기의 손은 빨갛고 그 손안엔 아무것도 없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온다. 혹시 손 색깔은 달라질지 모르나 빈 손으로 가는 게 먼 길 가는 데엔 훨씬 수월하다.
죽음은 너나 나의 의지나 결단의 일이 아니다. 사람은 열심히 할 순 있으나 거기까지다. 잘하는 것은 애오라지 신의 능력이다. 열심히 살다 열심히 죽어 갈 수는 있지만 잘 살고 잘 죽어감은 철저히 당신의 의도이며 계획이다. 흰 가운 속에서 내어다 보는 그대, 아니 바로 나와 우리의 안개 낀 눈동자, 차갑고 퍼런 입술, 스러져가는 호흡 등의 극히 일부의 징후도 의학의 영역만은 아니다. 의학은 단지 함께 있어 줄 뿐이다. 무엇 하나 쥐어줄 수 없는 인위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처럼, 비 오는 거리에서 만난 그이를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받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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