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힘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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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세상에 우리가 믿는 신神은 없다. 있는 것이 확실한 것은 단지 자연의 법칙이다. 빛과 어둠의 힘으로 사람의 꽃이 붉게 피어나고 진다. 시든 꽃잎이 떨어져 무서운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다 사라진다. 우리가 믿는 신神은 단지 저 생에 곳간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2.
지구가 만들어낸 바람이 몽고의 사막을 건너와 황사를 뿌린다. 오늘도 태양과 달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던 한 영혼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황천으로 돌아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떨어진 꽃잎을 애도哀悼하며 땅을 파는 은빛 삽의 소리가 무겁게 산을 울리고 떠난 자는 곧 잊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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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부산대 의대 졸업. 한양대 대학. 김경수내과의원.

1993년 '현대시' 등단. '시와 사상' 발행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두 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성경(聖經)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自然)이다.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서 존재하는 것이나 일어나는 현상’을 자연이라면 세월은 자연의 하나다. 그 세월은 철저히 쌓인다. 지금껏 '세월이 간다'라고 말하지도 쓰지도 않으려고 늘 조심한다. 세월은 온전하게 쌓여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나 어릴 적 -아니 지치고 곤비(困憊)한 요즈음에도 더러- 버스에 타고 있노라면 별안간 길가의 가로수가, 가로수 옆의 집들이 뒤로 뒤로 줄지어 달려가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버스가 또한 버스에 탄 내가 앞으로 달려갔지만 순간적으로 가로수며 집이 뒤로 간 것처럼 착각 한 것이다. 혹시 시든 꽃잎이 쌓였다가 색이 바래고 문드러져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없이 휘날려 허공과 섞여 버리기도 하지만 꽃잎은 꽃잎의 세월로 쌓여간다. 애정이 쌓이고 우정이 미움이 사랑이 쌓이고, 지식도 덕도 빚도 추억도 슬픔도 황사처럼 쌓이고 쌓인다. 우리네 인생사와 연분이 있는 모든 것들이나 일들이나 속내들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죄다 들먹이면서 뒤에 쌓인다는 말을 붙이면 어느 하나 어색한 것이 없다. 지나간 머언 기억을 내가 잊은 것이지 기억이 세월에 얹혀, 기억이 세월 따라 흘러간 것이 아니다. 세월이 기억을 씻어간 것이 아니다. 이른바 문득, 불쑥, 뜬금없이 떠오르는 아련한 대소사를 어느 누가 세월 따라 흘러갔다고 하는가? 의식에서 잊혀졌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삽질에 의해 땅 속에 놓여지더라도, 자연 어딘가에 만들어 놓았을 곳간 어느 한 페이지에 나 역시 내가 받은 선물의 미미한 일부분으로 고스란히 적혀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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