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길’ 선택에 결정적 역할

이광수 '사랑'
필자는 고등학교 학생 시절 대학진학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의과대학을 권하였지만 나는 적성에 맞을지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춘원 이광수 선생의 ‘사랑’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은 1936년 결핵성척추염으로 경성의전병원에 입원하였던 이광수 선생이 담당 의사였던 장기려 선생을 모델로 집필한 소설이다.

주인공 안빈은 내과의원을 개업한 뛰어난 임상의사이면서 꾸준하게 연구를 병행하여, 마침내 인간의 핏속에 사랑과 증오를 조절하는 특별한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계몽주의자인 이광수 선생은 장기려 박사의 실제 모습에 살을 붙여, 주인공을 완벽한 이상형 의사로 묘사하였다. “유명한 문학가이면서 뜻한 바 있어 의사가 되고, 유능한 내과의에 탁월한 연구를 진행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다.” 고등학생의 눈에 이러한 안빈의 태도와 생활에 마음이 끌려서 의과대학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솔직히 덧붙일 것은 여주인공 석순옥을 비롯해 많은 여자가 안빈의 인격을 흠모하는 것도 마음에 끌렸다.

이 소설에서 이광수 선생은 진정한 사랑을 제시했다. 자기를 쫓아 다니는 청년과 안빈의 후처(부인이 폐결핵으로 먼저 죽음) 자리를 두고 고민하는 여주인공의 감정 상태를 동물실험에서 확인하면서, 차츰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내용은 춘원이 천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당시에는 아직 호르몬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시절이었으나, 춘원은 이러한 물질의 존재를 예측하였다.

의과대학 졸업 후에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이 소설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선 환자를 돌보는 내과를 선택하였고, 고창순 교수님의 대학원 학위지도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핵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핵의학은 독립된 분야가 아니어서 장래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새로운 분야로 개척할 것이 많고 동경하던 연구자로서의 생활도 가능한 점이, 내가 핵의학에 끌린 또 다른 이유라고 하겠다.

병원 과장도 끝내고 다소 한가해진 수년 전부터 학교와 의료 현장에서 느낀 점들을 하나 둘 글로 쓰게 되었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전하고 싶어 작년 여름 ‘젊은 히포크라테스를 위하여’란 제목의 산문집을 발간했다. 이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사랑’의 안빈이 문학가였다는 내용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었다.

그동안 핵의학의 놀라운 발전에 동참하며, 어린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소설 한권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을 실감하게 된다.

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정준기
서울대학교병원

핵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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