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山 민병석 선생을 추도하며

▲ 김일훈 박사
在美 내과 전문의, 의사평론가
한 인간의 생애를 적은 글 전기(傳記)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유명인사의 성공담을 소개한 글이며, 다른 하나는 잊어버린 한 인간의 일생을 발굴하여 소개함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꺼져 가는 인물에 영구성을 부여하는 글이다. 인산(仁山) 민병석 선생(전 가톨릭의대 성모병원장‧전 대통령주치의)이 가신지도 어언 25년! 그의 이름이 차츰 망각되어가고 있다. 민 선생은 1983년 10월 9일 대통령주치의로 업무를 수행하다가 미얀마의 랭군에서 순국하였으니 이날 한국은 장차 의료계를 이끌어 나갈 큰 별을 잃었던 것이다. 꺼져 가는 인물 그러나 살아 계셨으면 지금쯤 ‘가장 자랑스러운 한국의 성의(聖醫)’가 되었을 민병석 선생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김으로 그를 다시 우리 기억 속에 되살려 보고자한다.

민병석(閔炳奭) 선생은 1960~70년대 한국의학계의 현대화에 가장 앞장서고, 젊은 나이에 학술과 연구분야에서 첫 손꼽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교육열과 인술이 몸에 베인 천품으로 인해 동료 및 학생들의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았었다.
이제 새삼 그리운 민병석 선생이 떠올라 그의 ‘추모논문집’을 꺼내보았다. 1929년 1월 6일생이라 2009년 새해가 그의 팔순임을 알게 되었다. 민 선생은 서울의대(52년)를 나와 군의관 복무 후 도미하여(55년) 텍사스대학과 펜실바니아대학에서 내과수련의 4년을 마치고 1959년 귀국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 다녀왔다는 의료인은 대개가 교환교수나 연구생이라는 미명아래 미국의학 견문생(見聞生)이 대부분이었고, 민 선생 같이 최 일선의 수련의, 그것도 일류 대학병원에서 알찬 수련을 받은 분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도 고국 땅은 그에게 냉담했으니 그는 취직할 자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당시 그의 모교 서울의대는 관료적이고 보수적이었으며 태반의 교수들은 부업(야간개업)에 분주한 시기였다.

그는 6개월간 무직자로 룸펜생활을 해야만 했다. 민 선생은 이 룸펜기간을 회상하면서 “너무나 너무나도 답답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침 군의관시절의 친구(연세의대 허경발 교수)소개로 서석조 선생(당시 연세의대 내과과장‧순천향대학 창립자)을 만나 연세의대 내과강사로 취직이 가능했으니 그때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석조 선생으로부터 들은 민 선생과의 면담기(취직시험)가 재미있다. “그 친구(민 선생)와 요정에서 저녁식사 하면서 면담했는데 … 취직 부탁하는 사람이 저녁 값 낼 기색이 없어 할 수 없이 내가 냈지 … 그 만큼 순진한 친구란 말이야!” 훗날 필자가 이 말을 그대로 민 선생에게 전했더니 하는 말이 “돈 한 푼 없을 때인데 그 비싼 저녁 값을 부담할 처지가 못되었다” 하였다.

‘그 스승에 그 후배’란 격으로 이러한 민 선생에게 큰 점수를 주신 서석조 선생님이시다. 대학교직 자리가 거액에 거래된다는 뉴스도 있던 때라, 민 선생의 취직이야기 한 토막은 우리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연세대에서 비록 짧은 기간(8개월)이고 타교출신이기는 했지만 실력과 열성과 인품으로 해서 민 선생은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선생님이었다. 연세대와 그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으니 그 곳에서 만난 재원 김보경(소아과의사)과 결혼한 것이다.
1960년 서석조 선생을 따라 가톨릭의대로 자리를 옮겨 1983년까지 20여 년간 의학자와 교육자로서 종신 한 셈이다. 그사이 1962년 다시 텍사스대학 MD앤더슨병원에서 2년간 내분비학 연구를 했으며, Archive of Internal Medicine등 미국 유수의 내과잡지에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특기할 일은 귀국 전(1964년) 내과전문의를 취득했으니 그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내과전문의’다.

민 선생은 전종휘 선생(2007년 작고)과 더불어 가톨릭의대를 크게 키워 온 분이었으며, 미국에 있는 그의 제자들을 만나면 민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즉 그를 기억하는 가톨릭의대 출신에게 민 선생은 ‘신화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는 학자교육자일 뿐 아니라 타고난 인품과 덕성으로 해서 의학도의 존경을 한 몸에 지녔기 때문이다. 민 선생은 면역학과 신장학이 그의 전공이 아님에도 한국서 새삼 공부하여 이용각 외과교수와 더불어 한국최초의 ‘신장이식’의 주역을 맡았으며, 낙후된 한국의학을 세계수준에 올려 국제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민 선생이 가신 후 그의 자리를 물려받은 김동집 선생(전 가톨릭의대 성모병원장‧전 적십자사 혈액원원장)은 계속 노력하여 ‘골수이식’분야에서 동양 제일가는 실적을 내어 민 선생의 학문에 보답해왔다.

지금 필자 앞에 놓인 750쪽 되는 두터운 민 선생의 ‘추모논문집’에는 그의 Originality로 이루어진 주옥같은 의학논문 174편이 수록되어 있다. 새삼 그의 재능이 부럽고도 아깝다.
1976년 국제신장이식학회에 참가했을 때 그는 시카고에 들렀다. 중학(경기)대학동기인 송재현 선생은 그의 환영파티에서 “닥터 민은 우리나라 국보야”라고 자랑했다. 민 선생과 어릴 때부터 익혀온 죽마지우며 학우인 송 동문께서 민 선생을 ‘국보’라 하였으니 틀림없는 평일 것이다.
민 선생이 보내준 옛 편지에 의하면 1970년대 초기 월남후유증이 한창일 때 일시적이나마 미국이민 유혹으로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민 선생이 결단을 내려 이민 왔더라면 무사했을 텐데 하고 아쉬워 해본다.

서울대에서 한심석 총장이 그를 아껴 서울대교수로 올 것을 적극 권했으나 박봉으로 생활걱정이 되어 주저한다고도 적었다. ‘배보다 큰 배꼽’이라는 ‘촌지’의 존재를 민 선생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전종휘 선생의 만류로 민 선생은 가톨릭의대에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전종휘 선생은 내과과장자리를 1972년 약관 43세인 민 선생에게 물려주었다. 과거 대학 내과과장은 60대에 되는 자리인데 민 선생이란 큰 인재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 탐내는 자리를 후진에게 양보한 전종휘 선생 또한 훌륭한 분이었다.
필자는 1966년 도미하기 전부터 민 선생과 가까이 지내며 자주 대할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필자는 민 선생의 의학취미를 몹시 부러워했고 민 선생은 군대생활에서 자포자기하고 있는 필자에게 “때가 있으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항상 충고해주셨다.

민 선생은 그의 수필에서 “의사는 평생교육에 소홀함이 없어야한다. 의료의 첫 사명이 고통 받고 있는 환자에 대한 기술적 구원이기에…”라고 적었다.
박사학위나 전문의라는 간판만 따고 나면 돈벌이에만 열중(?)하는 한국 의료계의 풍토를 시정해 보겠다는 뜻이 역력하다.
민 선생은 결코 고지식한 학자가 아니었고, 박식했고 인간사에 관심이 컸으며 필자의 속된 취미에도 호감을 가졌었다. 재미있는 책이 있으면 그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의학잡지 ‘NEJM’과 ‘TIME’지가 눈앞에 있으면 어느 것을 먼저 읽겠느냐”고 하니 “물론 타임지!”하고 즉시 답했다.
그러나 민 선생은 정치문제엔 전혀 흥미가 없었으며, 정치라는 ‘정(政)’자도 잘 몰랐던 그가 어찌하여 대통령주치의가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지금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물어볼 기회도 없었고 또 필자 나름의 추측도 있지만 언급을 피한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점은 어의(御醫)가 나라의 제일가는 의사인지라 주위에서 그를 마땅한 자리에 오르게 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비극으로 끝날 줄이야 누가 예측했겠는가.

또 한 가지 특기할 일은 의사라면 ‘돈 만지는 직업’이며 제일가는 의사는 부자일 텐데, 민 선생의 짧은 인생은 ‘부(富)’와 인연 없이 살았다.
그의 추모논문집의 첫 장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라는 장문의 수필에서 그는 말하기를 “의사는 지나친 금전욕 및 이기주의를 버려야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많은 불우한 동포들이 있음을 잊지 말고 이들의 의료비부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1976년 미국학회 참가 시 그는 대학 내과과장인데도 미국행 입양고아를 돌보며 항공요금을 면제받았다. 1973년 그가 새집을 지었다고 반갑게 맞아준 그의 집은 한국 중류층가옥 이상이 아니었다.

민 선생이 가신 후 읽은 신문기사에 “대통령주치의가 사는 집이 그토록 소박한데 놀랐다”고 적혀 있었다. 생존 시 민 선생은 내과 여러 전문분야의 학회장을 두루 거쳤고 수많은 학술상을 받았으며, 자세한 기록은 생략한다.
1960년대 어느 날 민 선생은 가톨릭교의 영세를 받아 그의 여생을 천주님께 귀의했다. 그 후 많은 후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고 들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것이 아닐 것이며, 그의 일거일동과 발자취를 보고 바른 길이라 믿었기에 그가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성경구절(시편 90편)에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해도 80”이라고 했고, 이 세월이 날아갈 듯 빠르다고 했듯이, 잠깐 살다가는 인생은 민 선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민 선생이 가신지 벌써 25년이 지났으며, 금년은 그의 팔순이 되는 해이다. 하나님 곁에 가 계실 선생님 영전에 다시금 명복을 빈다.

▲ 민병석 선생 생전모습
▲ 민병석선생과 필자(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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