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그림은 프랑스의 유명한 인상파 화가 마네의 1859년 작으로 ‘압상뜨를 마시는 사나이(the absinthe drinker)’라는 작품이다<사진>. 당시 한 주정뱅이 불량아를 화실로 데려와 ‘압상뜨’란 독주를 마시고 난 뒤 몽롱하게 취한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당시 프랑스 대도시의 퇴폐적 분위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에메랄드 초록색으로 상징되는 이 술 압상뜨는 비단 마네의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고호, 피카소, 드가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당대의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압상뜨 애호가의 대열에는 이들 화가들뿐만 아니라 랭보, 베를렌, 보들레르 등 프랑스의 이름난 시인들과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등 대문호들도 합류하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압상뜨에 대한 그의 글에서 “계속 마시다 보면 당신이 보기를 원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매혹적인 초록 색깔과 뇌쇄적인 맛으로 ‘녹색요정(the green fairy)’으로 까지 불리면서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 술은 20세기 초 갑자기 역사의 주 무대에서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관심이 있는 애주가들이 아니면 그 이름조차 생소한 술이 되고 말았다.

압상뜨는 도대체 어떤 술이며, 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술의 부침의 배경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압상뜨는 55~72%의 고도 증류주로서 여러 가지 약초를 포함하고 있는 리큐르의 일종인데, 주재료는 쓴쑥(wormwood)과 미나리과 식물인 아니스(anise)이다.

이중 쓴쑥은 유럽 원산의 국화과 다년생 식물로 글자 그대로 쓴맛이 강한 식물이다. 쓴쑥은 압상뜨라는 술 이름이 그 라틴 학명인 ‘Artemisia absinthium’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압상뜨의 가장 중요한 재료로서, 주된 성분은 투존(thujone)이라는 화학물질이다.

압상뜨는 공식적으로는 1789년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스위스에서 살고 있던 Pierre Ordinaire란 의사가 처음 만들어 만병 통치적 성격의 치료용 음료로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당시 이미 그 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술을 Dr. Ordinaire가 처음 세상에 널리 알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이 술의 제조법은 그 후 여러 사람을 거쳐 Major Dubied란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고 그는 아들과 사위인 Henri-Louis Pernod와 함께 1797년 본격적인 압상뜨 제조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중 사위였던 Pernod가 훗날 압상뜨를 상업적으로 성공시키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압상뜨는 19세기 중반 알제리아 전쟁 시 프랑스군이 열병의 예방 및 치료제로서 널리 사용하면서, 전쟁 후 귀국한 군인들에 의해 그 인기가 더해지게 된다. 게다가 당시 필록세라 병충해로 인한 프랑스 술 시장의 전통적 지배자였던 포도주의 품귀 현상과 함께 압상뜨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생긴 가격 절하 효과가 겹치면서, 압상뜨는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프랑스 전역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끝을 모르던 압상뜨의 인기에도 서서히 검은 먹구름이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압상뜨의 시작도 의사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그 쇠락의 단초 역시 의사들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즉 1860년대부터 파리의 한 정신병자 보호소의 주임의사였던 Dr Valentin Magnan의 논문을 시작으로 압상뜨가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 특히 신경정신 계통의 부작용에 관한 부정적인 의견들이 꾸준히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때 마침 필록세라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포도주의 부활과 사회전반에 걸친 절주, 금주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압상뜨의 주성분인 투존이 불안, 경련, 현기증, 근육장애 등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급기야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고 자살까지 하는 일련의 정신착란적 행위조차 압상뜨와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05년 스위스의 Jean Lanfray 라는 한 농부가 압상뜨를 마신 상태에서 부인과 두 딸을 총으로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수많은 악소문에 시달리고 있던 압상뜨의 위상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이 농부는 평소에도 하루에 포도주 5리터씩을 마시던 알코올 중독자로 사건 당일만 해도 압상뜨 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포도주와 꼬냑 등을 마신 상태였지만 이미 기울어진 압상뜨에 대한 싸늘한 시선은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마침내 압상뜨는 벨기에(1906), 브라질(1906), 홀란드(1908), 스위스(1910), 미국(1912) 등에서 제조, 판매가 금지되고, 결국 1915년에는 본산지인 프랑스에서도 법적 금지 품목이 되었다.

이후 압상뜨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일부 국가에서 소량이나마 계속 생산되면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오래 동안 어둡고 비정상적인 술로서의 인식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이윽고 1990년대 초 압상뜨는 당시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자유 시장의 신시대를 맞이한 체코를 중심으로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당시 체코의 의욕적인 주류업자 Radomil Hill에 의해 본격적인 생산을 재개한 압상뜨는 전통 압상뜨와는 다르다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국 시장 등을 중심으로 그 판매량을 꾸준히 증가시켜 나가고 있다.

그 영향으로 체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 등지에서도 후속 회사들이 일부 생기면서 이제는 조심스럽게 또 다른 도약기를 기대하고 있다. 압상뜨에 대한 의학적, 과학적 검증도 그간 대부분 확립되었다.

여러 학술적 연구를 통해 지나친 과량만 아니면 압상뜨의 핵심 성분인 투존이 신경학적 합병증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과장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있다. 현재 EU에서는 법적으로 10mg/l 이하의 투존 함유량을 허용하고 있다.

압상뜨는 보통 70% 전후의 고농도의 독주에다 특유의 쓴 맛까지 있어 스트레이트로 음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은 설탕을 첨가하여 희석 효과와 함께 쓴맛을 다소 완화시켜 마시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 프랑스식으로 먼저 압상뜨가 들어있는 잔 위에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특별한 전용 숟가락을 걸쳐 놓는다. 그리고 숟가락 위에 각설탕을 놓고 그 위에 물을 조금씩 떨어뜨리며 설탕을 녹이면서 압상뜨에 설탕물을 혼합한다.

이 과정에서 고농도의 알코올에 녹아있던 아니스의 엣센셜오일(essential oils)이 해리되면서 술에 부유물이 생기듯이 점차 혼탁해 지는 것을 즐길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체코에서 개발된 방법으로 각설탕을 압상뜨에 적신 다음 숟가락 위에서 불을 붙인 다음 압상뜨와 혼합시키는 방법이다. 압상뜨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방법으로 생각된다.

사진에서 소개하는 압상뜨 미니어처는 모두 3종<사진>으로 특유의 맑은 에메랄드 빛 초록색이 대단히 매혹적이다. 오른쪽 제품은(50ml) 압상뜨의 새로운 등장을 주도하고 있는 Hill 회사 것으로 70% 제품이다. 왼쪽은(50ml) 체코의 또 다른 회사 제품인데 역시 70% 짜리다. 그리고 중앙의 압상뜨는(40ml) 프랑스산으로 60% 제품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스에서는 압상뜨를 ‘Absinthe’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비해 체코에서는 ‘e’를 뺀 ‘Absinth’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압상뜨는 현재 국내에서는 수입도 되지 않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미국에서도 2007년 5월에야 겨우 다시 합법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여 아직까지는 제대로 대중화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혹시 기회가 되어 압상뜨를 보게 되면 견문을 넓히는 기분으로 한잔 정도 맛을 보기를 권한다. 그야말로 역사를 마시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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