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5福(복)중의 하나인 考終命(고종명)은 오래 살아서 天壽(천수)를 다하고 집에서 자연사 하는 것을 말한다.(의학신문 8/8/00 필자의 `고종명' 참조). 그러나 한국인을 비롯한 선진국 노인들은 대개가 병원에서 사망하게 됐으니, 늙어서 죽음에 이르는 양상이 집에서 자연사하던 옛날과는 아주 달라졌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죽을 때의 내 모습 특히 병원에서 임종할 때의 사태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서는 여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해야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좋은 세상을 만나 자유와 인권존중이라는 인간의 기본권리를 법의 보호를 받아가며 향유하다가, 이제 오랜 건강수명 끝에 임종할 때도 `평소 자기가 바라던 모습대로 죽을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즉 죽는 병에 걸렸을 때 “얼마만큼 치료받다가 어떠한 모습으로 죽고싶다”는 임종시의 자기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되었기 때문이다.(의학신문 필자의 첫 번째 `안락사 개론' 참조). “`존엄사'할 것인가? 또는 법이 허용하면 `안락사'할 것인가?” 하는 생전유언(Living Will)을 현재(미국) 또는 장차(한국?) 준비할 수 있게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필자는 안락사와 존엄사 시비를 말하기 전에 의사로서의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경험을 먼저 말하고자 하니, 그 이유는 필자의 견해 내지 주관은 전적으로 경험을 통해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 존엄사에 대한 견해 -

1966년 도미한 필자는 내과 수련을 다시 받기 시작하여 숙직하느라고 24시간 병원근무하는 일이 잦았다. 숙직 때 고역의 하나는 `Code Blue-심장마비 발생'이라는 비상 방송이 울리면 재빨리 달려가서 무조건 환자를 되살리려는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소생술)를 시행한다. 여기 해당하는 대부분의 환자는 심장병(Heart attack) 중환자이며 그중 절반이상은 열성적인 소생법의 보람도 없이 죽어 가는데 그 임사(죽기 직전)의 모습 또한 가관이다.

각 종족의 수련의(백인 흑인 황색동양인 의사)들이 손을 바꾸어가며 `흉부 마사지'라 해서 환자의 가슴을 치고 눌리는 가운데 환자는 숨을 거두게되니, 마치 올림픽 광장에서 색깔 다른 만국기의 축복아래 壓死(압사)되어 천당행 하는 격이다.

CPR 겪는 환자 중에는 암이나 만성중풍환자 등 치료불가능 한 환자들도 있다.

이들은 CPR에도 불구하고 대개 죽기 마련이지만, 그중 일부는 불행하게도(?) 살아남아 예외 없이 혼수상태에다 호흡곤란으로 인공호흡기라는 승강기를 닮은 괴물에 매달리고 온 몸에 국수 줄 같은 많은 줄(혈관주사, 산소, 심장감시장치, 관 영양공급 등등)이 연결되어 `연명의료'의 덕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생명을 유지한다. 이때 환자모습이 국수 줄을 주렁주렁 달았다 하야 Spaghetti Syndrome (자장면 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하는 인생에서 왜 각설이를 달고 간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어떤 환자는 연명의료의 효과가 커서 몇 개월 또는 몇 년간 연명하는 수도 있다.

그들은 장기간 계속되는 혼미한 정신상태 중에서 이세상의 아름다운 꿈을 꿀지, 원망하는 지옥의 꿈만 꿀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필자의 한국수련의 시절에는 심장마비환자는 별로 없는지라 CPR는 사고로 죽는 젊은이에게나 실시해봤고, 또 당시 병원서 죽어 가는 노인환자는 서둘러 퇴원시켜서 집으로 모시고가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인명을 존중한다는 미국에 오니 환자의 상황은 무시한 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려야한다는 어떤 맹신적인 종교관으로, 또는 의사의 잘못된 사명감으로 이러한 비인도적인 `의료연명'이 필자의 미국생활 전반기라 할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 되었던 것이다.

Karen사건 후 1980~90년대에는 의사의 재량권이 넓어져 말기중환자에겐 CPR 못하게 지시할 수도 있고, 생전유언을 소지한 환자나 또는 연명의료를 원치 않는 가족의 수도 눈에 뜨이게 증가하는 경향이었다. 필자는 1999년 미국 연방병원에서 은퇴 전 몇 년간 노인병 환자병동의 책임자로 일한 적이 있어, 많은 치매환자와 그들 가족을 겪어보았다. 존엄사나 안락사의 대상은 `치료해도 회생 불가'한 `말기환자'(non-curable and terminal)라야 한다. 치매는 육체적으로 건강해도 `불치환자'라 규정하나, 중병이 있거나 쇠약하여 침상에 눕는 지경이 돼야만 `말기환자'가 된다.

그들은 보호해서 걸어다니며 QOL(삶의 질)이 전혀 없는 치매들이지만,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만성병이 있는 자는 약을 계속 복용하고있다. 그런데 `말기가 아닌' 이런 환자가 심장수술 등 어려운 시술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으나 이를 거부할 존엄사 대상이 될 수가 없어 딱하기만 하고, 이럴 경우는 법 범위 내에서 가족의 의사(원치 않는)를 존중하여 병원윤리 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 생전유언은 환자 정신상태가 판단력이 있을 때(Competent) 서명한 것이 유효하다. 그래서 초기의 치매나 중병으로 혼미해진 환자는
서명할 시기를 놓치게된다. 그럼으로 Living Will은, 다른 유언(재산관계)처럼, 우리정신상태가 건전할 때 일찌감치 갖출 일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생전유언이 없는 미국환자가 절반이상이며, 이런 환자의 병이 악화되어 서명할 판단력을 잃을 때는 가족의 소원을 받아드리는 주도 있다. 그러나 `연명의료'에서는 어디까지나 본인의사가 가장중요시 되어야한다고 해서, 여기대한 생전 유언(Living Will)문제는 미국과 유럽선진국가에서는 법적으로 이미 마무리단계에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존엄사'에 한해서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일본 안락사협회'가 1976년 조직되어 1983년 `일본 존엄사협회'로 명칭 변경했으며, 이 협회에서 존엄사를 허용하는
법제화를 위해 적극 계몽을 하고있다지만 아직 여론수렴이 안된 상태인줄 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국은 존엄사나 생전유언문제에 있어 아직 처녀지라고 한다.필자의 모친과 장모는 지난 1년 사이 서울서 작고했다. 둘 다 90노인으로 오랜 병상생활 끝에 갔다. 내 모친은 X대학병원에서 불행하게도 존엄사와 고종명을 외면한 채 인공호흡기에 매달려서 갔다. 마침 의료대란이 시작할 때라, 여기에 관해서 쓴 필자의 글 `고종명'을 읽은 어떤 원로 선배님은 평하기를 “정부에서 병원경영을 힘들게 하니 그런 식으로 해서 수입을 올려야지”라 했다. 장모는 다행히도 친지의 개인병원에서 부분적이나마 존엄사 했다. 우리인간은 육체적 영생이 불가능하며 우리모두 죽음을 조만간 맞이해야 하는데, 그 죽음은 반드시 인도적이라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필자는 경험을 통하여 연명의료의 결말이 지극히 비인도적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실감했으며, 따라서 존엄사를 찬성한다.

그래서 존엄사에 관한 한 한국에도 선진국 예를 따라 임종시의 본인의 의사와 권리를 받드는 `생전 유언 Living Will'이 조속히 법제화되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우선 학계 언론계가 주도하는 계몽과 여론수렴이 절실히 요망된다. 유교전통사회에서 존엄사를 계몽하는데는 많은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 한국지식인들의 역할이 크다고 믿는다.

- 안락사(PAS: Physician-assisted suicide)에 대한 견해 -

안락사 즉 PAS 행위는 의사가 환자에게 독약과 다름없는 치사량의 약을 주사하거나 또는 사망장치를 써서, 자기목숨을 끊을 에너지가 없는 말기환자의 자살을 도와주는 일이다.

중환자를 고통에서 한시라도 빨리 해방시킨다는 뜻에서 자비살인(Mercy Killing)라고도 부른다. 이일이 인도적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많은 견해 차이가 있는 줄 안다. 필자도 의사생활을 오래하면서 심한 고통에 신음하는 중환자를 대할 때 Mercy Killng의 충동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필자자신을 생각할 때 이런 자살행위만은 당하고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다.

우리는 현재의 문화와 윤리 속에서 살며, 허무주의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죽은 뒤에도 현재의 윤리에 사는 자손을 괴롭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도 우리자손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니, 안락사하고 나서 가족에게 남기는 큰 상처를 고려해야만 한다. 윤리의 기준이 1세기 후엔 달라진다 해도 오늘을 살아온 우리의 평가는 현재의 기준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행위만은 피해야 한다. 인생은 苦海(고해)라 했듯이 우리는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많은 고생길을 악착같이 살며, 실망하면서도 좌절되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왔다. 중병말기에서 존엄사를 택할 경우, 즉 `연명의료'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생명은 아무리 질겨도 1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일평생 태평양 같이 넓은 고해를 해쳐온 우리가 조그만 호수같은 마지막 고해를 건너갈 각오는 돼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이 세상을, 후손에게 오점을 남겨가며 하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며 죽는 순간도 현실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하니 마지막 순간의 자살행위를 거역하며, 안락사를 극복하고 임종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신념이자 안락사에 대한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존엄사를 적극 찬성하나, 안락사 논의는 시기상조라고 본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