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 최초 응급의학과 개설 -저체온치료와 에크모 응급의료에 도입

민용일 교수
민용일 교수

[의학신문·일간보사=차원준 기자] “정년퇴임을 하면 매일 마음 졸이던 일을 잊고 좀 편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의료계 상황을 보니 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민용일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2월말 정년퇴임을 한다. 민 교수의 이름 앞에는 ’국립대학 최초로 응급의학과 개설‘, ’저체온 치료와 에크모를 응급의료에 도입‘ 등이 따라온다.

먼저 응급의학과 개설에 대해 질문했다. 민 교수는 “당시 흉부외과에서 신생아수술에 빠져 지내던 중 느닷없이 노성만 병원장이 응급의학과를 개설해 보라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흉부외과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부하고 병원에 출근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노성만 병원장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다. 계속 거절하는 건 몹시 힘들었다. 1993년 8월 전남대병원에 국립대 최초로 응급의학과를 개설하게 되었다”고 웃음지었다.

흉부외과 시절에 대해 민 교수는 “1988년 2월 전남대병원 흉부외과에서 전공의 수련을 마친 후 흉부외과 교수가 되고 싶었다”며 “1990년 공보의가 끝나자 흉부외과에 돌아와 펠로우가 되어 Neonatal heart surgery 공부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재밌는 이야기로 “당시에는 임상 교수 제도가 없어 무급 펠로우 생활을 했다. 한 달에 교통비 12만원을 받는게 전부였다”며 “그렇지만 교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어려움을 말했다.

이어 “Neonatal heart surgery는 쉽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 신생아복합심기형수술 성적은 내놓고 이야기를 못할 정도로 수술사망율이 너무 높았다. 전남대병원에서도 신생아 심장수술을 성공한 경우가 한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에 “신생아심장수술에 관한 논문들을 열심히 검색한 결과 후쿠오카 소아 병원의 카도의 수술성적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1992년 6월 일본으로 연수를 떠났다”며 “아내의 월급으로 6개월간의 일본 후쿠오카 소아 병원에서의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본 연수시에는 “카도선생의 배려로 도착 다음날부터 수술필드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 직접 보지못했던 복잡심기형의 pathology 및 수술 technic은 물론 Priming solution과 cardioplegic solution의 조성 및 high flow pump technic, 마취시fluid maintenance 용량, 수술 후 약물 사용 및 신생아 인공호흡기 조절 등까지 환자를 보는 전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민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자료를 얻어 챙기고 매일 밤 그날 수술에 대한 카도선생의 수수술테크닉부터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의 신생아 인공호흡기 조절 및 약물의 종류와 용량 등에 대해 빠짐없이 기록했다. 당시 소아 심초음파는 초기 단계였다. 그래서 수술field에 참여하지 않는 날은 심초음파실과 심도자실에서 진단기술을 습득했다. 그렇게 6개월의 연수를 마치고, 1992년 12월 31일에 전남대병원 흉부외과로 복귀했다”고 연수 과정을 말했다.

복귀 후에는 “1993년 1월부터 오봉석 교수님을 도와 neonatal heart surgery를 위한 새로운 setup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TGA환자에게 Jatene arterial switch operation을 시작으로 연속해서 3명의 신생아수술에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다시돌아와 응급의학과에 대해 “그때의 응급환자 진료시스템은 인턴 네 명이 모든 진료를 도맡아 하고 각과 레지던트를 콜해서 환자를 보는 시스템이었다. 응급실은 모든 임상과의 관심 밖에 있었고, 인턴과 1년차 레지던트들의 책임하에 운영되고 있었다”고 열악한 환경을 말했다.

이에따라 “응급실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밤 10시 넘어서 좀 한가해져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못 들어간 날도 많았다. 인턴이 콜을 하면 내과 전공의들이 환자를 보러 왔지만, 그들도 미숙하긴 마찬가지였다. thoracentesis, pleural biopsy, chest tubing 등 잘 알고 있는 흉부외과 관련 술기들을 가르쳐주고, 당시에는 잘하지 않던 subclavian, internal jugular vein puncture, venous cutdown 등 중심정맥확보술을 시술하며 응급실 의료사고 예방에 주력했다”고 힘들었던 생활을 설명했다.

“새로운 과를 만들었으니 진료, 연구, 교육을 모두 세팅해야 했다”는 민 교수는 “이민화 학장의 배려로 응급의학강의에 1학점(16시간)을 배정받아 1994년도부터 바로 응급의학과 강의를 개설할 수 있었다”며 “바로 국립대 최초였다”고 상기했다.

혼자 강의를 시작한 민 교수는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아 강의안을 만들었다. 응급의학 개요, EMS 시스템, ACLS, ATLS, PALS, Toxicology, environmental injury, disaster medicine까지 8개의 주제로 강의안을 구성했다. 강의를 정식으로 따낸 것은 상당히 큰 성과였다. 보람도 있었지만 또한 엄청나게 힘들기도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어진 응급의학과의 성장에 대해서는 “1994년 처음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뽑았다. 4명이 지원하여 시험을 통해 윤한덕과 허탁이 합격했다. 5월에는 외과 전문의인 조석주가 군의관을 마치고 응급의학과 펠로우로 들어왔다. 총 4명의 멤버가 갖춰졌다”고 시작을 말했다.

처음에는 “다들 응급의학이 뭔지 잘 몰랐다. 원광대 박제황교수를 찾아가 많은 것을 배웠다. 원광대 전공의 유인술이 응급의학 교과서인 로젠과 틴티넬리를 소개해줘 즉시 미국에서 직구매를 하고 저널도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응급의학과의 대표 저널인 American journal of emergency medicine과 new England journal of emergency medicine이었다. 교과서가 구해진 뒤 아침마다 모여 로젠 첫장부터 북 리딩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기초를 쌓아나갔다”고 말했다.

“기도확보장비 확보를 위한 멤버들의 일화가 많다”, “좋은 기구를 들이고 싶었지만 과에 돈이 없어 돈이 들지 않는 대체품을 고민해야 했다. 흉부외과 심장 수술할 때 사용하던 bypass circuit을 구해와서 needle cricothyroidotomy line을 만들고, retrograde intubation을 위해서는 catheter guidewire를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cricothyroidotomy kit도 마련하여 emergency airway cart에 비치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 확보가 가능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어느 날은 “조석주가 다른 부서에서 쓰다 버린 초음파 하나를 주워왔다. 영상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조석주는 그걸 들고 다니면서 처음으로 bedside US를 시작했다. 외상환자가 오면 전부 초음파를 해서 혈복강, 혈흉 등을 진단해냈다. 지금은 FAST라고 불리는 초음파 술기를 당시 조석주가 한 것이다”고 칭찬했다.

당시 “임상 각과 교수들은 응급실에 대해 워낙 관심이 없었다”, “응급환자는 저년차 전공의 몫이고 입원실은 외래를 통한 교수님들의 차지였다. 개선됐다고는 하나 지금도 비슷한 경향으로 병실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고 응급실 운영에 대해 지적했다.

이에더해 “아침이면 이미 환자가 60명 이상 응급실에 깔려 있었다. 새로운 환자를 받을 공간이 없었다. 보조 베드는 있는 대로 전부 가져다 환자를 눕혔다. 그걸로도 부족하니, 간호부에서 매트리스를 무진장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환자를 눕혔다. 너무 많은 환자가 적체되어 있다 보니, 어디에 어떤 환자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더구나 “Computer programing을 열심히 하던 윤한덕이 응급실베드를 그려서 환자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는 데 적용이 불가능했다. 애당초 환자가 어디가 있는지도 모르는 시장통이었다”고 최악의 환경을 말했다.

고민 끝에 “책장과 간호사 준비장을 이용해 1동 main 엘리베이터 쪽 입구를 막고 하나의 입구만 남기고 매트리스도 전부 치워버렸다. 결국은 병원장실로 불려 올라갔다. 의외로 김신곤 병원장은 동조해주고 힘을 실어주었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응급실 환자를 교수책임하에 빨리 처치하고 병실로 올리는 순환시스템의 확보였다”며 “병원회의를 통해 수차례 강조했지만 임상 각 과에선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애로를 이야기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응급실에 있는 환자를 과별로 분류하고 신문을 만들어 매일 아침 응급실에 환자가 가장 많이 깔려 있는 내과 의국으로 배달했다. 아침 컨퍼런스 때 응급실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도록 병실을 좀 배정해주라는 의도로 내과 각 분과 의국을 찾아 방 밑으로 신문을 밀어 넣은 것이다. 내과에서 난리가 났지만 김신곤 병원장이 책임지겠다고 힘을 실어 줘 버틸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응급실에 의국 공간 확보가 매우 어려웠다”, “제대로 된 의국도 새로 꾸미고 응급센터운영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던 계획은 많은 좌절을 겪게 되었다. 8동 응급센터 설계부터 참여해 단계적인 응급환자 진료를 위해 그려왔던 설계를 모두 바꿔버렸다. 응급의학과 의국조차 설계에서 없애버렸다. 새로운 건물 그것도 응급센터로 이전을 했지만 응급의학과는 갈 곳이 없었다”고 애로를 이야기 했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야했다”, “중앙응급의료센터에 있는 윤한덕에게 연락했다. 윤한덕도 전공의와 펠로우 시절 의국이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윤한덕의 도움으로 응급센터 도서실 자리에 의국을 차리게 되었다. 대학동기들이 정식의국 이사를 축하해 주면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벽 책장을 맞춰주었다” 고 즐거워 했다.

민 교수는 ”윤한덕 전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그립다“며 ”2019년 설 명절 때 응급의료만을 생각하며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난 그는 누구보다 똑똑했고 대한민국 응급의료쳬계를 힘껏 끌어올린 사랑하는 제자다“고 추억했다.

“응급의학과를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항상 고민했다”, “cardiopulmonary bypass와 hypothermia를 떠올렸다. 응급의학과가 만들어질 때 회원들은 대부분 외과 출신이 90%였다. 마취과가 두세명 있었고, 흉부외과는 혼자였다. Hypothermia나 체외 순환에 대해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흉부외과에서 개심술 때 루틴으로hypothermia와 cardiopulmonary bypass를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hypothermia와 ECMO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2005년 10월에 처음으로 저체온 치료를 시작했다. 그때는 전용 장비가 없었다. 그래서 비닐봉지에 얼음과 물을 넣어 묶어서 목과 머리, 겨드랑이에 밀착시켜surface cooling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후 “2010년에는 심정지 환자에게 정경운을 데리고 ECMO를 시작했다. hypothermia를 하고 처음으로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환자는 의과대학 1년 후배였다. 심실세동으로 왔는데 CPR 후 중환자실에 올려서 hypothermia를 했다. 이 때부터 surface cooling blanket, central venous cooling device 등을 구비해 본격적인 TTM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에더해 “에크모는 이미 흉부외과에서 많이 경험해 본 터라 펌프팀, CPR팀, 시술팀 3개 팀으로 나눠서 개를 이용해서 리허설을 하고 응급의학과 단독으로 시술이 가능하도록 셋업했다. 응급의학과에서 단독으로 에크모를 시행하다보니 CS, CV 등 타과들과 팀을 이루는 것보다 골든 타임을 세이빙 할 수 있고 어느 시간대에나 에크모시술이 가능해졌다”고 자랑했다.

또한 “심폐소생실 안에서 승모판치환술을 시행한 적도 있었다. CPR도중 구챠트를 보니 mitral stenosis가 있는 환자였다. 심장판막질환이 있으면 일반적인CPR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 바로 에크모를 걸고 흉부외과 후배교수에게 연락해 수술기구와 간호사를 데리고 응급실로 내려오게 하여 승모판치환술을 시행했다”고 승모판치환술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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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일 교수는 “전남대 의과대학의 에크모와 hypothermia가 전국에서 가장 활성화 된 대학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 한 것 같아 작은 자부심을 느낀다”며 “세월이 빠르다는 것이 세삼스럽게 느껴진다”고 회고했다.

이어 “30년 동안 큰 과오없이 과를 이끌고 90명이 넘는 전문의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변함없이 나를 따르고 도와준 제자들 덕분이다”며 “고마워 제자님들. 서로 우애하고 협력하여 지금보다 더 나은 교실을 만드는 데 힘써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당부했다.

민용일 교수는 퇴임 후에도 호남지역 광역응급의료상황실장을 맡게된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어도 응급실을 체크하러 가겠다고 부지런히 나가는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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