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의학신문·일간보사] 서울 광진구 자양동(紫陽洞)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의 옛터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2호인 이곳은 조선시대 3대 임금인 태종(재위1400~1418)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만년에 머물렀던 락천정(樂天亭)이란 정자가 있었던 낙천정지(樂天亭址) 전경이다. 낙천정터 현관에는 “태종(太宗)이 왕위를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지은 이궁(離宮) 낙천궁(樂天宮)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종은 태종과 의논하여 대마도(對馬島) 정벌군을 파병하였고, 이기고 돌아온 정벌군의 환영식을 베풀었다.”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조선초 태종이 왕위를 물려주고 거처했던 으로 세종1년(1419) 2월에 상황인 태종을 위해 지은 이궁(離宮)에 딸린 정자가 있던 자리다. 정자가 세워진 곳은 주위보다 약간 높은 곳이어서 대산(臺山,해발42.8m)으로 불리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아서 시리미산(甑山) 또는 발산(鉢山)이라고도 하였다. 낙천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세종때 좌의정 박은(朴訔)이 지어 바쳤다.

세종1년에 3월부터 9월까지 7개월 안 상왕인 태종이 20여회나 낙천정에 거동하였는데 그때마다 주연이 베풀어졌다. 이 해 8월 대마도 정벌 때에는 9도 절도(節度)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000명의 사열을 받기도 한 역사적인 건물이다.

태조이 세종 4년에 승하하자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주었다. 그 후 성종 3년(1472)에는 국립양잠소격인 동잠실동잠실(東蠶室)로 사용하게 되고, 인조 원년(1623)에는 채소밭으로 사용되었으며, 관운장의 영정을 모셔놓고 어사각이라 한적도 있었다.

현재의 낙천정은 1991년 복원된 것으로 16층의 계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주심포 팔작 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계단 위에 정면에 해태 모양의 사자 조각상이 사뿐히 얹혀있다.

낙천정지(樂天亭址)는 서울기념물 제12호(1993.4.3.)로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63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낙천정지의 규모양식은 건평 37.44평, 정면 3칸, 측면 2칸 주심포 팔작지붕이다.

낙천정지는 조선시대 정자 터이다. 현재 낙천정(樂天亭)은 강변북로에 면한 자양동 낙천3길 현대아파트 102동 우측에 있다. 낙천정은 원래 자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곳 언덕 위에 있었다. 이 곳 언덕은 모양이 높고 둥그스름한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시리미산(甑山)·대산(臺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산(鉢山)이라고도 불렀다.

대산(臺山)은 표고 약 43m 정도 밖에 안 되는 낮은 언덕이지만, 한강이 발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속에 처져 섬을 이루고 있는 잠실동·신천동과 그 건너 남한산성이 병풍처럼 벌려 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경승지였다.

조선 태종은 즉위 18년(1418)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후, 그 해 9월 이 곳 대산 (臺山) 아래 서북쪽 모퉁이에 이궁(離宮)을, 산 위에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원년(1419) 2월 낙성하였는데, '어사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좌의정 박은은 정자의 이름을 ≪주역≫ 계사편의 "樂天知命故不憂(낙천지명고불우, 천명을 알아 즐기노니 근심하지 않는다)"에서 뜻을 따서 '樂天(낙천)'이라 지었고, 의정부참찬 변계량(卞季良)은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지었으며, 한성부윤 권홍(權弘)은 이를 써서 같은 해 9월 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

변계량은 <낙천정기>에서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큰 강과 못 뚝이 서로 얽히고 출렁이며, 연이은 봉우리와 겹쳐진 멧부리가 차례로 나타나고, 층층이 나온 것이 언덕을 둘러 모여들어 많은 별들이 북두칠성을 둘러싼 것 같기도 하니 과연 하늘이 만든 승지(勝地)다."라고 칭송하였다.

태종은 낙천정 뿐 아니라 서울 동쪽에 풍양궁(豊壤宮)과 서쪽에 연희궁(衍禧宮)을 지어 번갈아 거처하며 만년을 즐겼으나, 이곳에 더 많이 거둥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세종 원년 이 곳에서 세종과 함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삼판선(三板船)을 꾸미게 하였고,

이 해 8월 체찰사(體察使) 이종무(李從茂) 등이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남해를 거쳐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들을 위하여 환영연을 성대히 베풀고 상을 주었다. 세종 2년 정월부터 상왕 태종과 대비 원경왕후는 이곳에 옮겨 거처하게 되므로, 왕은 수시로 나가 양전(兩殿)에 문안한 후 유숙하고 돌아옴은 물론, 왕비 또한 때때로 낙천정에 나가 문안드렸다고 한다.

세종 3년 5월에는 오위진(五衛陣)이라는 군사훈련을 사열한 일도 있으나, 세종 4년(1422) 5월 태종이 승하한 후 왕은 이 정자를 그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사급(賜給)하였고, 공주는 이를 작은 아들인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다. 성종 3년(1472)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잠실(蠶室)로 이용된 듯하며, 인조 원년(1623)에는 채전(菜田)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정자 주변은 모두 깎여서 강변도로와 주택지가 되었고, 현대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서울특별시에서는 1987년 낙천정의 자취를 알기 위해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1991년에는 한국전력공사를 비롯한 3개 주택조합이 낙천정을 옛 터에 새로 지어 서울시에 기증하였다.

새로 지은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겹처마 팔작지붕의 5량가구이다. 남측 기둥열에만 장초석으로 받치고 후면에는 높은 대를 쌓고 일반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공포는 2출목으로 내부 살미는 교두형이며, 포간에는 화반이 놓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처리하였고, 추녀 뒷초리는 반자 처리를 하였다.

화양정 설명에는 화산(지금 삼각산)동쪽 한수(漢水) 북쪽에 들이 있으니 땅이 펑퍼짐하고 넓으며, 그 길이와 너비가 10여리나 된다. 뭇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드리웠다. 태조께서 도읍을 정하신 당초에 이곳을 목장으로 삼았다. 임자년(1432)에 세종임금께서 사복시제조 관충추부사 최윤덕(崔潤德)과 이조참판 정연(鄭淵)에게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다.

낙천정과 화양정은 근거리에 있고 경치가 좋은 한양의 동교에 있던 경치 좋은 목장지대와 정자가 세워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 문인인 양성지(梁誠之 1414~1482)는 화양정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한가할 제 말이 가는대로 세상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 닿은 먼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같고

비온 뒤 싱그러운 풀위 푸른요를 깔았네

꾀꼬리 오르락내리락 아침햇볕에 울고

소와 말은 부산하게 사방으로 흩어지네

흥겨운 봄바람에 3월도 늦은데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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