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원장 ·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의학교육은 의학지식(Medical Knowledge)과 의학술기(Medical Technique) 그리고 의학 전문 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 세 요소를 잘 갖춘 의사를 양성하는 과정이다. 의학은 이론과 실습을 통해 체득해가는 독특한 교육방법을 택하고 있다. 교육의 결과는 의료기관의 분위기와 보건의료시스템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특수성을 잘 감안하여 의학 전문직업성이 의사의 머리와 가슴과 몸에 잘 스며들도록 교육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의학 전문직업성 교육은 정규과정(formal curriculum)과 비정규 과정(informal curriculum) 두 트랙으로 진행된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열매를 맺듯이 의학교육도 교육환경과 의료문화가 중요하다. 학생과 전공의가 배우는 주변 환경과 학습 환경은 때로는 독이 되는 환경이 되어 교육목표를 훼손하고 망가뜨려 버리기도 한다. 또한 보건의료 시스템은 전문직다운 행위(professional behavior)를 장려하고 발전시킬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다.

교육책임자 철학·의지 크게 작용

먼저 정규 교육과정은 교육기관이 표방한 교육 이념이나 목표로 짜여 있다. 교수진은 교육기관의 이념이나 목표가 표현된 것들을 가르치게 된다. 기관 전문직업성(Institutional professionalism)이라고 한다. 정규교육과정은 체계화된 교수 방법을 이용하여 임상 경험과 자아 성찰을 향상시키도록 설계된 모든 교육활동들이다. 정규교육 활동 속에 의학 전문직업성 교육은 반드시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육기관 책임자의 철학과 의지, 소신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만약 교육기관의 수장이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거나 특성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 분이라면 정규과정을 통한 의학 전문직업성의 교육내용이 당연히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교육기관 교육 이념과 교육내용 속에 의학 전문직업성이 잘 배어 있어야 한다. 교수 개발을 통해 교육기관 수장과 지도교수들이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한 역량을 지닐 수 있도록 과정이 먼저 제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수 개발 과정은 집중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학 전문직업성 교육에 관심이 높은 핵심그룹이 형성되면 이들이 정규 교육을 개발하고 이끌고 갈 수 있도록 재정적, 정책적 배려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비정규과정 긍정·부정 영향력 커

한편, 비정규 교육과정은 의학 전문직업성을 배우는 데는 대단히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책으로 쓰여 있거나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다.

교수진과 학생 사이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학습이 일어난다. 이같은 비정규적이고 잠재적인 교육과정(informal and hidden curriculum)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학생들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비정규 교육과정은 미리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중에 교수진과 학생 간에 일어나는 대인 관계 형태의 학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카페에서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습자가 함께 있는 어떤 상황에서나 일어난다. 학생, 전공의 그리고 동료는 항상 배우는 중이다. 단계마다 교사와 롤모델은 동료로부터 원로 의사까지 다양하다. 여러 계층에 있는 롤모델과 가르치는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학생과 전공의의 태도에 좋거나 혹은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의학교육에서 이러한 영향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비정규 교육과정을 통해서 좋은 영향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이 더 쉽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유교적 관습과 조직에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의국 문화는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학생들과 아래 연차 전공의들은 환자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에티켓과 매너를 정규 교육보다는 비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보고 모방하면서 익혀가게 된다. 임상 교수나 위 연차 전공의의 행동과 말투는 강력한 교육 수단이 된다. 환자 진료에 임하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문제점을 해결해 가는 모습과 환자를 배려하는 말과 행동은 생생한 교육의 재료가 된다.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롤모델이 필요한 이유다.

의학 전문직업성 평가 고무적

의학 전문직업성이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온 후 교육의 성취도와 결과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정규 과정이든 비정규 과정이든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 새로운 흐름이다. 평가 작업은 보건의료제도의 비인간적인 문제에 잘 대처하고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인 의사를 양성해 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평가작업이 의학교육자에게 어려운 일이지만 의학 전문직업성 교육에 있어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전문직업성 교육 평가 과정이 규칙과 행위 목록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의학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고 내실 없는 교육이 되어 오히려 교육을 그르치게 만들 수 있다. 평가를 통한 피드백이 교육과정에 잘 반영되려면 교수와 상급 전공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청취되어야 한다. 모든 교수진과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서로 협업을 해야 하고 정규적인 학습 프로그램을 짜는 것과 더불어서 비정규적인 잠재적 교육과정에도 관여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은 건전한 교육 문화가 형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교육 환경과 더불어 보건의료시스템 역시 의학교육에 큰 영향을 준다. 환자를 위한 양심적인 진료를 하는 것이 기계적 심사 기준에 붙잡혀 방해 받거나, 윤리적 민감도를 저하시키는 의료 정책들은 건강한 의료문화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 학생이나 전공의 시절부터 환자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변질시키는 의료 정책의 문제점들을 전문가적 지식과 판단으로 명확하게 집어내고 올바른 진료 형태를 알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물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 주기보다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전문가로서 정면 승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비록 이러한 행동들이 의료 정책에 당장 반영되지 않더라도 환자를 위해 불합리한 의료시스템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책임감을 배워 가게 된다. 우리나라와 같이 정부가 보건의료시스템에 깊이 관여하는 나라에서는 정부의 일관되고 합리적인 의료정책이 의학 교육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건전한 의료문화가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고상한 의학 전문직업성을 갖춘 도적적인 의사’가 될 것을 강요하거나,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시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