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원장 ·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의학 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탈전문화 흐름을 타고 심하게 위협받고 있다. 잘못 설계된 의료보험제도와 관리의료의 지나친 개입, 의사의 윤리적 민감도를 떨어뜨리는 이해상충의 문제, 진료 인센티브 정책 등과 같은 암초들에 포위되어 있다.

의학 전문직업성의 위협 요인들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의사들이 가져야 할 특성들과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 세기에 걸쳐 의사들이 지녀온 치유자(healer)의 특성과 전문직(professional) 특성 그리고 치유자이자 전문직이 공유하는 특성에 대한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첫째, 치유자 특성의 변화를 살펴보자. 치유자 역할은 기원전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등장하는 개념이다. 돌봄(caring)과 측은지심(compassion), 열린 마음(openness), 환자와 함께하기(presence)와 같은 특성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특성 중에서도 환자 자율성(patient autonomy) 개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주제가 되었다. 나치 인체실험과 터스키기 매독실험을 계기로 과거 온정적 부권주의(paternalism)에서 환자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추세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환자는 의사가 제공하는 설명을 듣고 이해한 후 자신의 진료방향과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형태로 의료문화가 바뀌고 있다. 환자중심 진료(patient-centered care)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환자 자기결정권 존중 추세로

둘째, 전문직 특성의 변화다. 중세 길드 문화에서부터 생겨난 전문직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특성이 생기거나 그 의미가 매우 많이 바뀌었다. 시대적 요구와 의료기술의 발달과 함께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화하고 있는 영역이다.

먼저 의사가 전문직으로서 가지는 자율성(autonomy)의 변화다. 환자 자율성에 대한 비중이 커지면서 의사 자율성은 부분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의사들은 의료보험 제도와 관리의료, 사회의 커져가는 기대감으로 인해 의사 자율성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사회에 대한 책무성(responsibility of society)이다. 의사에게 기대하는 책무가 커질수록 의사 자율성 부분은 줄어들게 되며, 사회는 의사들에게 새로운 단계의 책무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의학 전문직업성은 사회의 기대와 요구하는 수준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단순한 치유자의 역할만 담당해 오던 히포크라테스적 전통관에서 벗어나 전문직으로서의 새로운 특성을 갖추어야 한다. 탈전문화 흐름 속에서 의료의 본질을 지키며 환자 이익을 우선적으로 대변할 수 있도록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문직업성이 교육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야 한다.

전문직의 중요한 특성인 자율 규제(self-regulation)는 의료 전문직에 부여된 특권이다. 이러한 특권은 의학에 도움이 되기에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분야에 대한 결정은 오직 전문직 종사자만이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의료 전문직에 부여된 자율 규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의사들의 자정능력을 의심하고 사회가 법과 제도를 만들어 의사들을 통제하려고 할 것이다. 의사협회가 회원의 이익을 추구하며 자율징계를 동시에 진행하는 일을 매우 힘든 일이다. 이제 의사협회의 역할과 정체성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학의 주된 초점은 의사가 보건의료서비스팀(health care team)의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한 명의 의사가 한 명의 환자를 돌본다는 전통적 이미지가 변하고 있다. 전문 직종 간에 이루어지는 임상 활동과 전문직업성을 배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자율규제, 의료전문직의 특권

셋째는 치유자와 전문직이 공유하는 특성 변화의 변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타심에 대한 이해의 변화다. 이타심은 치유자와 전문직이 공유하는 개념 중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이타심(altruism)은 의사가 환자 이익을 자신의 이익보다 우선으로 두고, 환자가 의사를 믿을 수 있게 하는 무언가를 말한다. 이타심의 중요한 측면은 의사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과 전공의는 이타심이 환자 신뢰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과 신뢰의 부재는 곧 불완전한 치료로 이어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 생활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 의사들은 이타심의 개념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이타심과 유사한 개념인 책무, 돌봄, 측은지심에 대해서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정서가 있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타심과 개인 생활 사이의 균형을 이루도록 이러한 부분이 전문직업성을 가르치는 프로그램 내에서 섬세하게 다루어야 할 사항이다.

이타심-개인생활 균형 이뤄야

과거 가치 지향적 전문직업성에서 현대 전문직업성으로 이동하는 의학 전문직업성 특성의 변화상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이 의학 교육 초기단계에서부터 소개되어야 하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강조되었으면 한다. 필자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대부분의 기성 의사들은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해 교육받지 못한 세대이고, 이렇다 할 의사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기에 급변하는 의료환경과 의사들에게 대한 사회의 요구에 매우 당황스러워하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의사들의 생각과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의식 차이를 좁히지 못한다면 전문직의 위치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의학 전문 직업성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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