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에 근무하면서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가 아직은 쓸만하게 작동하고 있구나' 하고 느낀 계기가 있다. 초강대국인 미국도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의 수가 우리나라 인구수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이다.

오바마 1기 정부시절인 2010년 3월 21일 근 100년 만에 미국의 건강보험개혁법이 통과 되어 오는 2019년까지 3200만 명의 건강보험 적용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메디케이드(Medicaid) 지원을 늘리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하며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건강보험개혁을 위한 예산은 향후 10년간 9400억 달러가 든다. 이라크 전쟁비용보다 작은 금액이다. 그간 부당한 이익을 벌어 온 제약업계와 건강보험회사의 세금을 높여 국가 재정은 단 1달러도 악화시키지 않겠다.”

눈을 국내로 돌려보자. 건강보험 재정은 수입을 늘리고 지출은 줄여야 하는데 건강보험료 인상은 어느 정권에서건 국민의 저항으로 어려울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노령화 속도는 매우 빨라 만성질환도 늘어가고, 그에 따라 의약품 사용량도 늘어나고, 건강보험 보장폭도 계속 확대될 수 밖에 없어서 지출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쉽게 통제할 수 있고 또한 직접적으로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약가인하이다.

작년 약가일괄인하 조치는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폭이어서 제약업체들은 반대논리를 만든다, 국민에게 호소하는 광고를 한다, 서명운동을 한다, 생산중단 시위를 한다는 등등 분주하게 반대의견을 표명하였으나 정부의 강한 드라이브에 반론은 묻히고 말았다. 회사들이 막무가내로 반대만 할 수도 없던 것이 정부가 주도하는 보험 환경 속에서 일정한 수익도 나고 안정적으로 성장도 해왔지만, 위험이 적은 제네릭 개발에 안주하다 보니 과열된 마케팅으로 여러 부작용도 낳아왔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약가일괄인하'라는 강한 처방에다가 다행히도 신약개발 경쟁력을 갖춰서 글로벌제약사에 비해 뒤처지지 않을 능력을 키우라고 제약선진화방안도 함께 내어 놓았다. R&D우수 제약사 (혁신형 기업)에 대한 우대 등이다. 선정된 회사들은 제약산업 선진화라는 정책 목표에 따라 당근이 주어진 것은 다행이지만 그래도 매는 싫껏 맞고 당근은 너무 조금이라는 주위의 푸념도 자주 듣지만 그나마 선정되지 않은 많은 회사들은 당근도 없이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살아 남아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매출이 확 날아가면서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서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회사들은 예외 없이 자구책을 찾아야 했다. 누구나 뾰족한 묘수가 있지는 않아서, 인적 물적 구조조정을 통하여 바짝 허리띠를 졸라매든지, 아니면 획기적으로 매출을 늘리기 위해 외자사의 불록버스터의 판매권을 자처하든지, 일반약을 더 팔던지, 화장품이나 기능성식품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 하든지, 정말 남이 가지 못한 획기적인 약을 들고 나가서 글로벌에서 경쟁하든지 등등이다.

그동안 수많은 자구책 중에서 제너릭이 80%를 받던 중흥시대에서 68%를 받던 준 중흥시대를 거쳐 이제는 일괄 53.5%의 시대로 오면서 과거 따듯한 안방에서의 영화는 없다, 연구개발과 수출만이 살길이다 고 느낀 것은 긍정적이라 평가하고 싶다. 제약회사들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와중에 언론에서는 웬만한 제약기업들은 자기 자본금의 몇 배가 되는 사내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다, 중견기업은 1천억 이상 이다 는 등의 기사가 나오기도 해서 미래가 보이지 않을만큼 어렵다면서 그래도 아직 시절이 좋은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나 위기가 닥치면 만일을 대비하여 씀씀이를 줄이려다 보니 필자처럼 연구개발을 맡는 입장에서 보면 씀씀이를 줄이기 가장 쉬운 곳이 언제 결실을 맺을지 모르는 연구개발투자와 정말 밥값은 하고 있는지 모를 전문인력의 확보라서 당장에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다른 부작용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국내 내노라 하는 제약사들이 전략적 제휴라는 미명아래 아무리 박한 마진과 굴종을 강요해도 다국적사의 블록버스터 판매대행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안타까운 현상도 벌어졌다. 나만이 가진 물건이 있어야 글로벌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데 의약품의 이런 물건이 일조일석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연구개발비도 절약하고 인적 구조조정을 해야 만 하는 환경은 우수인재가 끊임 없이 유입되는 선 순환구조를 막을까 우려된다. 일괄인하 1년을 넘기면서 내 물건 가지고 세계를 상대로 장사하는 진정한 국내제약사의 글로벌화를 위해 새로운 묘안을 찾아야 한다.

정 원 태
한국유나이티드제약

글로벌 개발본부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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