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에서 진료를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혈압약을 받으러 오신 여자 환자분이 계셨다. 이날은 진료를 보고 나서 머뭇머뭇하면서 일어나시지 않으셨다. 그러더니 보건소의 치매 환자 지원을 물어보셨다. 치매환자 지원은 다른 부서에서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서 위치만 알려드리고 보내려 했다.

그런데 환자분 표정이 너무 안 좋으셔서 몇 가지를 여쭤봤다. "누가 치매에 걸리셨나요?" "시어머니가요." "진단 받은지 얼마나 되셨어요?" "진단은 안 받았구요…. 요즘 행동이 이상하셔서요."

순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진단도 안 받고 지원부터 받으려고 하나 싶었다. 그리고 혹시 환자는 없는데 지원만 받으려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어머니가 보건소의 방문진료 대상자였다. 더군다나 내가 담당하는 환자. 그제서야 상황을 알게 됐다. 오늘 오신 환자분의 수심이 깊은 표정도 이해가 됐다.

시어머니는 1년 전에 간암으로 아들을 잃으신 분이었다. 방문진료를 갈 때마다 항상 우울해 하셨고, 매번 죽고 싶다는 말을 하셨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만 함께 사는데 시어머니까지 치매에 걸리셨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 다음 주가 그 시어머니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한 눈에도 횡설수설하고 온전치 못한 것이 보였다. 집에 와 계셨던 이웃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한 밤중에 이웃집 문을 두들겨서 뭘 잃어버렸으니 찾아달라고 하신 적도 있으시고, 며느리가 들어오면 계속 따라다니면서 잠시를 가만히 안 놔둔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고 답답했다. 사실 본인은 의료 정책 때문에 예민해져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은 싼 값으로 좋은 의료를 보장받고 있고, 저희 보건소에서도 우울증 약 지원이다 뭐다 해서 혜택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앞에서는 의사로서, 의료인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예전에 읽었던 엔도 슈사쿠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이승우 작가가 쓴 글이다.

"'침묵'의 저자인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에세이집 어디에선가 다음과 같은 체험담 하나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는 대단치 않은 질병으로 잠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옆방 환자가 내지르는 짐승의 울부짖음을 닮은 신음소리 떼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옆방에는 폐암 환자가 입원해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이 작가는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환자가 그렇듯 극심한 통증으로 괴로워하면 어떻게 하는가? 간호사가 대답합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우린 그저 곁에 앉아 환자의 손을 꼭 쥐고 있을 뿐 입니다. 한동안 그러고 있으면 통증이 차차로 가시기 때문에 간호사들이 교대로 손을 잡아 주지요."

엔도 슈사쿠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진통제를 맞고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울부짖는 환자의 손을 붙잡아 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그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쯤 후에 그에게 큰 수술을 받을 일이 생겼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깨기 시작할 묵렵 통증이 너무 심해서 엔도 슈사쿠는 고함을 지르며 다시 진통제를 주사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중독을 염려한 의사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는 한층 절망적으로 소리만 질러대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간호사가 그의 침대 곁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믿기 어렵게도 그 지독하던 통증이 조금씩 가시고, 웬만큼 견딜만 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의료 정책을 바로 잡아서 적절한 수가에 한 환자를 오래 보는 것은 환자들을 위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똑똑한 의사가 되어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것이 환자들을 위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환자의 손을 잡아주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겠다. 의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의사도 너무 쉽게 그 마음을 잊어버린다.

그 집을 나서면서 조금만 더 있다가라고 붙잡는 환자의 손을, 평소에는 다른데 또 가봐야 한다고 능숙하게 뿌리치던 손을 그날은 오래 붙잡고 있었다.

박 지 훈
보령시보건소 공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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