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어느 시장에서 한 남자가 사설을 시작했다. "내 직업은 노예 거세꾼이요."
한 나그네가 호기심을 느끼고 묻는다. "거세라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게 이렇소. 노예를 구멍이 뚫린 의자에 앉혀서 그 구멍을 통해 고환이 아래로 처지게 하오. 그런 다음 벽돌 두 장을 들고 아주 세게 때리는 거요." 나그네는 얼굴을 찡그리며 토를 단다. "그거 무지 아프겠는걸요!" "천만에요, 걱정하지 마시오. 조금도 아프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소. 두 벽돌이 부딪히는 순간에 양쪽 엄지손가락을 얼른 빼면 되는 거요.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나는 고통을 느낀 적이 없소."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 중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의사는 의료현장에서 많은 아픔을 만난다. 허리가 아프다, 손발이 저리다, 어지럽다, 기침이 안 멈춘다, 배가 아프다, 가렵다, 눈이 침침하다, 심지어 온 몸이 아프다까지.

아픈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설령 그 시간이 점심식사 후 졸음이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오후 두 시가 아니더라도 짜증이 난다. 심지어는 "기침한다고 죽나?", "그 나이에 관절 안 아픈 사람도 있나?"라는 일반인이 듣기에 섬뜩한 생각까지 들 수 있다.

학생 때 대학병원에서 봤던 100일을 훌쩍 넘어 몇 달씩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떠올리며 보건소까지 걸어올 정도면 멀쩡한 거 아니냐고 내 생각을 합리화 시킨다.

나의 아픔은 다르다. 신규 공보의는 아직 훈련소의 기억이 유효하다. 훈련소 기간에 딱 맞춰서 찾아온 황사와 내무반의 먼지 때문에 4주 동안 떨어지지 않는 기침으로 1시까지 잠을 설쳤다.

겨우 든 잠이 기침 때문에 새벽 4시에 깼을 때 나의 기침은 단순한 증상이 아닌 끔찍한 질병이다. 며칠 전 장염에 걸려서 으슬으슬하고 온 몸이 욱신욱신하고 속이 부글부글, 더부룩한 채 텅 빈 관사에 누워 뒤척였다. 그 때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다고 느꼈다.

환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공감을 해보면 어떨까. 공중보건의 복무기간은 공감이라는 진부한 단어가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다.

공중보건의 제도는 완벽하지 않다. 의사가 필요한 곳에는 배치되지 않고 의료시설이 충분한 곳에 배치되기도 한다. 지역 보건에 도움을 주고 싶지만 시간 활용이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의대를 갓 졸업하고 온 경우에 실력이 모자람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감하기는 장소가 어디든지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지금 당장, 어떤 환자에게라도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공감을 할 수는 없다. 환자가 한 명 올 때마다 내가 한 번씩 아프다면 아무도 견뎌낼 수 없다. 올바른 진단과 처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시도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공감하기는 나쁘게 보면 '감정노동'이라는 업무가 추가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정노동' 대신 헨리 나우웬의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를 떠올리고 싶다. 종교적인 색채를 빼더라도 '상처받은 치유자'는 모든 의사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 지 훈
충남 보령시보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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