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보면 여러가지로 어려운 일을 맞이하게 된다. 전연 뜻밖의 불행이 닥쳐오기도 하고 예기치 않던 기쁨이 찾아오기도 한다. 건강했던 사람이 졸지에 사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않았던 희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고 또 경험해왔다. 어쨌든 고달픈 인생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반듯이 기쁨이나 행복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오래가지 못하고 잠시 스쳐가는 기쁨이나 행복 일 망정 우리 인생에는 꼭 있게 마련이니 희망이 생긴다.

필자에게는 하루에 한 번씩 기쁜 일을 찾아보려는 습관이 있다. 공개적인 기쁨까지는 아니더라도 혼자서 나마 기쁘다고 느껴지는 일이 가끔 생긴다. 하루를 지내면서 이것저것을 생각해보면 자기딴에는 기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는 법이다. 물론 기쁜 일은 많을수록 좋지만 단 한번이라도 기쁘다고 느껴지는 일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필자는 소위 ‘삼성(三省)’에 대하여 상당히 관심이 많다. ‘삼성’은 논어에 나와 있는 증자(曾子)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得不習乎?)

남의 부탁을 받았을 때 어물어물 넘기지 않고 전력을 다했느냐? 친구에 대하여 성실치 않은 태도를 취한 일은 없느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 받은 것을 되풀이 복습해서 완전히 자기 것이 되도록 했느냐? 증자는 공자의 제자이며 공자보다 46세 연소했다.

삼성(三省)은 하루에 세 차례라는 뜻이 아니라, 세 가지 반성이라는 뜻을 말한다. 반성은 하루에 몇 번을 해도 좋다. 그런데 이상의 세 가지에 대하여 만족할 만하다는 답이 나온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은 없겠지만 내가 바라는 기쁨은 그렇게 고상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말한다.

어느 한 주일을 예로 들어보자.

◇2011년 6월 27일(월): 오전 11시 경기도민회장학재단 임원회가 서초구 센트로 호텔에서 열렸다. 63명의 임원들이 참석했다. 나는 이해제(李海載) 회장의 요청을 받아 나의 인생담의 한 가지를 이야기했다. 삶의 보람을 유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순간’을 중요시 하라”는 교훈이라고 했다. 내가 기회있을 때마다 되풀이 하는 이야기다.

과거에도 소개한 바가 있지만 결혼식 주례사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신랑·신부에게 묻는다. “‘금’이 있는데 ‘금’ 중에서 어떤 종류의 ‘금’이 값진 것이냐?” 대부분의 신랑·신부의 답변은 ‘순금’, ‘황금’, ‘백금’이다. “옳다. 그러나 진짜로 값진 것은 ‘지금’이다.”라고 필자는 말한다. 그리고 “시간 중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사람 중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하고 있는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끄덕이면서 미소 지었다. 필자로서는 기쁜 일을 하나 경험한 것이다.

◇6월 28일(화): 오전 11시쯤 김창환(金昌煥)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물론 안부전화다. 김형은 필자와 중학교 동기이지만 1920년 생으로 필자보다 3년 연상이다. 제1고보(京畿高·전신)에 함께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같이 지냈다. 막역한 친구이다. 졸업 후 김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구 제8고교(나고야·名古屋 소재)를 거쳐 도쿄대학 농학부에서 공부한 수재이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에서 인생의 전반부를 보냈다.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하는 등 그의 연구열은 왕성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곤충학자로서 존재를 과시해왔다.

옛날 우리나라에 ‘문화인’제도가 시작됐을 때 김형은 ‘문화인’으로 추대된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필자보다 훨씬 앞서 선출된 학술원 회원이다. 학술원회원이 됨으로서 우리 두사람 사이는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 내가 학술원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김형은 크게 도움을 줬다. 필자의 후임회장이 이현재(李賢宰)박사였는데 그때는 김형이 부회장으로서 이회장과 명 컴비가 되어 활동했다.

그런데 수년전부터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때로는 입원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외출을 하지 못할 정도이며 가끔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래도 안심은 되자만 직접 만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사무실에 나와 있는 필자를 몹시 부러워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더욱 미안스럽다 그렇기는 해도 김형의 목소리가 필자에게는 크나큰 기쁨을 준다.

◇6월 29일(수): 오전 10시에 수지읍(경기도 용인시 水枝邑)에 소재한 녹십자를 방문했다. 마침 폭우가 쏟아져 약속 시간보다 약 20분 늦게 도착했다. 허일섭(許日燮)회장 등 간부 임원들의 환대를 받았다. 허회장은 8층에 소재하고 있는 필자의 옛집무실(현재는 사장실로 사용 중)을 비롯하여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된 8층의 이모저모를 보여주었다. 근대 디자인의 힘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필자는 고 허채경(許采卿, 고 허영섭 회장 선고)선생과 허영섭(許永燮)녹십자 사장의 권유로 1989년 2월에 녹십자 회장에 취임하여 근무한 일이 있다. 근무 중인 1991년 4월에 환경처장관으로 임명되어 회장직을 떠났고 허사장이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허회장은 내가 떠난 후에도 내가 쓰던 사무실을 그대로 비어 두었고, 1992년 6월에 환경처장관직을 물러나게 되자 필자를 명예회장으로 발령하고 사무실을 계속 사용하도록 했다.

1997년 2월에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나고 고문이 되었다. 현재도 필자는 녹십자 가족임을 자랑하고 있다. 8층의 여러 시설을 시찰한 다음 새로 마련된 접견실에서 간부진들과 대화를 나눴다. 고 허영섭 회장을 중심으로 한 옛날이야기들이 그칠 줄을 몰랐다. 녹십자 생활이 필자의 인생에서는 대단히 무거운 비중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몹시 즐거운 한 때였다.

◇7월 1일(금): 서울의대 동기생 김교명(金敎命)형이 내방하여 오찬을 함께 했다. 옛날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은 물론이다. 김형의 처지도 어렵다. 부인을 잃은지 오래됐고 얼마 전에는 며느리도 잃었다. 현재는 홀로된 아들과 아직 미혼이며 아주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있는 손자와 셋이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남자만 셋이 사는 까닭에 식사는 배달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미 한 해의 반이 지나갔다고 빠른 세월의 속도를 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언제나 기쁘다.

◇7월 2일(토): 체코 프라하와 프랑스 디존(Dijon)에서 연속해 열렸던 국제학술회의에 출석차 22일 출국했다가 7월 2일 오후 4시에 귀국하는 셋째 딸 동희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갔다. 외손녀 미규와 함께 갔다. 다리가 심상치 않아 혼자서 출영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미규의 도움을 받아서 다행이었는데 어쨌든 귀국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참으로 기쁘다. 사위 안화승(安和承·인하대 화공과 교수)는 전공분야의 실력과 능란한 영어 실력이 인정되어 국제학회 참석이 빈번하다. 동희도 비슷하다.

◇7월 3일(일): 언제나와 같이 한 가족이 함께 오찬을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강남의 모 식당에서 든 이탈리아식 음식은 별미였다. 오찬 후 외증손자·녀들과 함께 성북동 집으로 돌아와 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필자에게는 대단히 기쁘고 행복하다.
이상에서와 같이 지나가는 매일을 살펴보면 예외 없이 하루에 한 두 번은 꼭 기쁜 일을 만날 수 있다. 기쁜 일은 일부러 찾아서라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데서 사는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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