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1주년인 지난 2011년 6월 25일을 전후해서 KBS TV에서는 ‘한국의 유산’이라는 프로에서 어느 미국 노병사가 부르는 ‘아리랑’을 되풀이 방영했다. 80이 넘은 이 노병사는 6·25전쟁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어 참전했는데 그때 ‘아리랑’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사실 ‘아리랑이 한국 사람에게는 가장 애창 되는 국민가요이며, 근래에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많이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라는 노래는 제아무리 음치라고 해도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부를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한 사실이 있다. 이렇게 친숙한 ‘아리랑’이지만 가사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작곡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문득 ‘아리랑 고개’를 떠올려보게 된다.

돈암동 사거리에서 정릉동 아리랑 시장에 이르는 고갯길을 ‘아리랑 고개’ 또는 ‘정릉고개’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정릉으로 가는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라고 불렀으나 1926년에 영화 ‘아리랑’이 이 고개에서 촬영된 후 부터는 ‘아리랑 고개’로 불리운다. 폭 15m, 길이 1450m의 2차선 도로였는데 요사이는 상당히 현대화 되었다. 서울시내의 도로가 ‘대로’, ‘로’, ‘길’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만은 유일하게 ‘고개’로 남아있다.

‘아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원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 아리랑이라고 하며 이 밖에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긴 아리랑’등 여러가지 별조(別調)아리랑이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개조되기도 한 것이 분명하다.

어렸을 때에 ‘아리랑’이란 영화를 관람하고 몹시 충격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종로 2가에 있던 우미관(優美館) 아니면, 종로 5가에 있던 제일극장이라는 영화관에서 관람했다고 기억된다. 이 영화는 1926년에 고 나운규가 감독하고 주연한 무성 흑백영화다. 열을 올리면서 웅변을 토하던 변사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3·1운동의 실패로 충격을 받아 미쳐버린 영진 젊은이와 그의 여동생 영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영진을 찾아온 친구 현구가 영희에게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들의 애틋한 사랑이 잘 그려져 있다.

악덕지주의 머슴이자 친일파인 기화가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를 겁탈하려고 한다. 이 광경을 본 현구가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 벌인다. 그런데 실성한 영진은 이 광경을 재미있게 여긴다. 그러다가 갑자기 환상에 빠져든 영진이 돌발적으로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그리고는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연진의 뒤에서는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나운규가 주인공 영진역을 맡고 신일선이 영희역, 현구역을 남궁 운, 악덕 지주의 청지기 기호역을 주인규가 각각 맡았었다.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을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한편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 올리는 데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 영화로 나운규는 한국영화계에 큰 획을 긋는 거장이 되었다. 나는 ‘아리랑’을 들을 때마다 영화 ‘아리랑’을 회상하게 되며 나운규의 예술성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신(新)아리랑’이 폭발적으로 유행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신아리랑’은 양명문이 작시했고 김동진이 작곡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싸리문 여잡고 기다리는가
기러긴 달밤을 줄져간다
모란꽃 필적에 정다웁게 만난이
흰국화 시들듯 시들어도 안오네
서산엔 달도 지고 홀로 안타까운데
가슴에 얽힌정 풀어볼길 없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초가집 삼간을 저산밑에 짓고
흐르는 시내처럼 살아 볼까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의 유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여러 설이 있다.

① 아랑설(阿娘說): 옛날 밀양 사또의 딸 아랑이 관리의 요구에 항거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 이를 대도하기 위하여 생겼다는 설

② 알영설(閼英說):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 알영을 찬미하여 ‘알영 알영’하고 노래를 부른 것이 ‘아리랑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설

③ 아이롱설(我耳聾說):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수했을 때 백성들이 원납금(願納金)성화에 못견뎌 ‘단원아이롱 불문원납성’(但願我耳聾 不聞願納聲: 원하노니 내 귀나 어두워 져라, 원납소리 듣기도 싫구나)이라며 부른 ‘아이롱’(我耳聾)이 ‘아리랑’으로 와전 되었다는 설

④ 아리랑설(我離娘說):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에서 부역으로 온 인부들이 고향을 생각을 하며 ‘아리랑 아리랑’ 노래를 한 것이 발단이라는 설.

이외에도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구음(口音)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유래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어쨌든 ‘아리랑’ 노래는 한국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 노래 인데 그 바탕에는 ‘애수’가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예부터 애수가 흐르고 있으며, 일제에 감정당했었을 시절 한(恨)이 더욱 심화 되어 마음속에 스며드는 슬픈 시름과 쓸쓸함 즉 애수가 흐르게 됐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1996년 9월 3일부터 3일간 팔라우(Palau)를 방문한 일이 있다. 팔라우는 1543년 이래 스페인에 지배되었다가 1899년에 독일에 팔렸으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일본에게 되팔려 일본이 지배했다. 2차 대전 중에 일본군 남방사령부가 설치되어 그 흔적이 현재도 남아 있다. 1947년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 1986년 자치공화국을 거쳐 1994년 10월에 독립한 섬나라다. 멜레케오크(Melekeok)를 수도로 하고 있는 인구 2만2천여명의 소국이다. 필리핀 남쪽 태평양에 위치하고 있다. 팔라우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내방하기도 했다.

특히 바다 밑 해저풍경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며 해변가의 경치는 일품이다. 나는 1996년 9월에 당시 WHO 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이던 한상태(韓相泰)박사의 권유로 방문했는데 집사람이 무척 좋아했으며 나의 생애 중 잊혀지지 않는 곳의 하나이다.

그런데 멜레케오크에는 ‘아이고 다리’라는 큰 다리가 있다. 2차 대전 때 일제가 한국 사람들을 징용해서 건설한 다리인데 하도 고생스러워 징용된 사람들이 ‘아이고 아이고’하며 힘들어 했다하여 ‘아이고 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를 건설하는 동안 ‘아리랑’ 노래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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