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운명론’에 관하여는 전에도 쓴 일이 있다.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적 생각을 해 왔는데 (‘나의 운명론 재확인’ 우강 에세이 제3집, ‘마이동풍’·2008 신원문화사·p327 참조), 몇년 전에 ‘Invictus’라는 시를 읽고 운명에 관한 종래의 해석을 재검토하게 된 일이 있다.

■ 운명이란

어디엔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힘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이 이러한 힘을 생각하고, 느끼고, 믿는데에는 별로 차이가 없지만 표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복잡성이 나타난다. 어쨌든 이 힘의 산물의 하나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세 여신(女神)이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탄생과 생명을 지배하는 클로토(Klotho), 인간의 일생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라케시스(Lachesis), 생명의 실을 끊어버리고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아트로포스(Atropos)가 그들이다.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의 상태를 알고 있는 인간은 의지(意志)의 힘을 부정하고 체념함으로써 고민이나 어리석음으로부터 탈피하려한다.

한편으로는 운명을 깨달음으로서 세상을 비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천적으로 된다는 견해도 있다.

운명에 대한 관념에는 종교적 측면, 도덕적 측면 등 여러가지 측면이 있다. 근대인의 운명관은 고대와 중세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과학의 발달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자연과학의 발달이 운명을 뚫고 나가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지적한 바와 같이 자연과학의 발달이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는 국면을 우리들 인류는 잘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운명을 개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 Invictus

‘Invictus’는 William Ernest Henley(1849~1903, 영국시인)의 시인데 ‘Invictus’는 ‘굴복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4절로 되어 있는 이 시에 관하여는 전에도 소개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옮겨본다.

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Black as a pit from pole to pole,
(온통 칠흑 같은 암흑)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For my unconquerable soul.
(억누를 수 없는 내 영혼에.)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난 움츠리거나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Under the bludgeonings of chance
(내려치는 위험 속에서)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Beyond this place of wrath and tears
(분노와 눈물의 이 땅을 넘어)
Looms but the horror of the shade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And yet the menace of the years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Finds and shall find me unafraid.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It matters not how straight the gate,
(문이 얼마나 좁은지)
How charged with punishments the scroll,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I am the Master of my Fate
(나는 내 운명의 주인)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는 내 영혼의 선장)

이 시에서 끝부분인 “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이라는 시구가 나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이 시구는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발생했던 폭탄테러 사건의 주모자인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 Veigh, 1968. 4. 23~2001, 6. 11)가 사용했던 까닭에 더욱 유명해졌다.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었던 연방정부 건물이 폭탄테러로 파괴된 사건이 있었다. 이 건물에는 마약 단속국 등 미국 연방정부의 각 기관 사무실과 탁아소가 있었다. 공무원들이 출근하는 시간인 아침 9시 5부네 사건이 발생했으며 168명이 사망하고 600여명이 부상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기획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인 맥베이(당시 26세)는, 사건 발생 2년 전 텍사스에서 집단자살한 사교집단 다위파에 대한 연방정부의 불만족스러운 처리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폭파 주범 맥베이는 사건 발생 6년 2개월이 지난 2001년 6월 11일 인디어 나주 테러호트 연방교도소에서 처형됐는데 처형 직전에 남기고 싶은 말 대신에 이 시구를 썼던 것이다. ‘Invictus’가 ‘운명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나에게 심어준 것이다.

■ 자연재해의 영향

근래 지구촌에서 발생하는 여러 자연재해는 나의 ‘운명관’에게 또다시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었다. 일본에서 일어났던 대지진·지진해열·방사선물질 확산 등은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19일이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지 100일 째 되는 날인데 아직도 회복은 요원하다. 나는 일본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왔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도쿄에서는 대진재가 발생했을 때 방사능 측정소가 한 곳 뿐이었는데 100곳으로 늘렸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아직 없다. 폐기물 처리는 아직도 미미하다. ‘일본’하면 ‘깨끗함’을 연상할 정도로 일본은 깨끗했는데 광범위한 피해지역이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9만여명의 이재민이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동일본 대진재는 일본의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발생한 것 중 1960년의 칠레지진(M 9.5), 1964년의 알라스카 지진(M9.2), 2004년의 스마트라 지진(M9.1) 다음가는 네 번째 규모의 대지진이다. 규모에 있어서 1000년에 한번 발생하는 재앙이라고도 지적된다. 일본이 완전 복구하는 데는 10년 내지 100년이 걸린다는 설도 있다.

남미 칠레에서 지난해 6월 4일 발생한 제2차 화산 폭발은 호주를 포함한 지구남반부에 심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 특히 화산재로 인한 항공대란은 아직도 수습할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더욱이 3차 폭발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불안감과 공포심이 가중되기도 한다. 동일본 대진재는 일본의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발생한 것 중 1960년의 칠레지진(M 9.5), 1964년의 알라스카 지진(M9.2), 2004년의 스마트라 지진(M9.1) 다음가는 네 번째 규모의 대지진이다. 규모에 있어서 1000년에 한번 발생하는 재앙이라고도 지적된다.

6·25전쟁 61주년이 되는 작년 6월 5일에는 제5호 태풍 ‘메아리’(MEARI)의 영향으로 서울에도 잔비가 내렸다. 대부분의 태풍이 7~9월에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발생하며, 6월 태풍이 드물다는 사실은 주지되어 있다. 특히 6월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한 것은 1963년에 ‘셜리’가 부산 인근에 상륙한 후 3년만이다. ‘메아리’는 필리핀, 대만 등에 막심한 재해를 주었으며 우리나라에도 집중폭우와 강풍으로 큰 피해를 안겨줬다. 태풍발생을 운명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이 답답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장맛비도 유난러웠다. 작년 6월 22일 시작한 장맛비는 7월 17일까지 무려 한 달 가깝게 계속돼 ‘역대 최장 연속강수’를 기록했다. 장맛비는 내리다가 멈추기도 하는 법인데 이번에는 연일 계속됐다. 강우량도 평년의 4배 내지 5배가 되는 700mm를 넘었다.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된 것은 물론이다. 역시 운명 탓이라고 밖에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난 앞에서는 인간이 지극히 작게 보이고 과학이 자취를 감춘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고 보니 ‘운명적’이라고 하는 ‘체념적’인 관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노·병·사’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관하여는 몇 번이고 썼다. 늙어가고, 병들고, 사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데 대하여는 더 설명할 나위가 없나. 노·병·사와 더불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자연재해를 생각하면 나의 운명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즉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상에서와 같이 운명에 대한 관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나이가 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예 체념하게 되기도 한다. 자고로 우리들에게는 체념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상당히 농후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운명적이라고 해도 이에 대비해야하는 의지(意志)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데 대하여는 재논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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